요안 23世(세)와 公議會(공의회)
2次 바티깐 公議會 첫 會期
敎會의 回春課業
46個月間 방대한 準備
貴重한 經驗 쌓아
討議가 聖歌같을 수야… 첫 會期에 滿足表明
調停委 任命코 次期에 萬般態勢
발행일1963-06-09 [제378호, 4면]
교황 요안 23세 성하의 그 많은 업적 중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개최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것은 가톨릭 및 가톨릭에 끼쳐준 그야말로 혁명적인 과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요안 성하께서 공의회 개최를 정식으로 선언한 것은 약 3년반에 걸친 준비활동을 끝낸 1961년 성탄날이었다. 교황령은 공의회의 개최에 관해 『항상 살아있는 교회, 계절의 「리듬」을 느끼는 청춘인지라 만대에 새 광채로 복되고 새 빛을 발산하며 그 자신을 들어서 새로 정복한 일들을 달성하며 신자들을 사랑하며 붙들어 주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그 배필된 자의 얼굴 안의 천주의 모상을 받도록 시위』할 것이라고 했다.
교황의 임명을 받은 특별 위원들은 1962년 10월11일 교황요안성하에 의해 정식으로 공의회가 개최되기까지 의제 및 제의 초안 등을 완성했다.
2,540명의 주교들과 201명의 전문위원들이 출석했다. 3명의 러시아 정교 대표를 포함하는 39명의 「프로테스탄」 및 동방 「올스독스」 단체의 참관대의원이 「옵서버」로 참관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비(非) 가톨릭 참관인을 초청한 역사사으이 초유의 일이었다. 그들은 모다 요안 성하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또한 독일태생인 그리스도교도 일치 추진국장 오그스틴.베아추기경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형제들」이란 말을 강조했고 항상 그들의 요청대로 일해갈 것을 확인했었다. 참관대의원들에 만족을 줄만한 준비와 예우는 그들의 일치된 칭송을 받아왔었다.
요안 성하께서는 제7세기부터 답습해오던 미사 전문(典文)을 처음으로 개정했다. 우선 성요셉을 공의회의 주보로 정하고 미사 전문(典文) 중에서 동정 성 마리아 이름 다음에 삽입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모두 전례문제 토의 중 된 일이었다.
계시(啓示)의 근원 문제가 그 초안을 둘러싸고 교차상태에 빠졌을 때 이를 타개하는데 교황의 간섭이 있어 난을 면한 일도 있었다. 교황은 토의를 중지시키고 수정안을 마련할 새 위원회를 세웠다.
공의회 교부들의 토의가 양론(兩論)을 벌리자 신문들은 개혁 또는 적응(適應) 등을 내세우는 「구룹」과 그 반대측을 지목하여 「진보」와 「보수」란 말을 즐겨 써나갔다. 혹은 지나치게 심각히 다룬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대체로 교회 안에 충분한 토론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참관대의원들은 가톨릭교회 밖에서 상상하는거와 같이 전제적인 조직이요 그 방법만 쓰고 있다는 인상을 불식할 수 있었다. 「옵서버」로 나온 분들이 이점에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것은 이번 바티깐 공의회의 특기할만한 일이며 그 성격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그1차 회기가 끝났을 때 요안성하께서는 1963년 9월8일 제2차 회기를 열기에 앞서 공의회 활동을 지시 감독한 조정위원회(調停委員會) 및 그 위원을 임명했다. 교황께서는 공의회의 성과를 만족할만한 것으로 보고 『전세계 가톨릭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견해의 불일치에 언급하여 『우리는 성가(聖歌)를 부르는 수사들은 아니다』라고 하여 소위 보수 및 진보측간의 논의를 낙관했다.
요안성하께서는 공의회 총회에는 단 한 번밖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특별 테레비 장치로 토의되고 있는 광경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RNS 특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