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23世(세)와 國際政治(국제정치)
발행일1963-06-09 [제378호, 4면]
요안23세 교황이 등극했을 때 이미 주불대사로서의 외교수완과 「베스니」 총주교로서의 사목적 헌신이 알려져있었다.
1944년 「빠리」의 임지로 파견되었을 때 2차대전 동안 프랑스와 「바티깐」 사이에 벌어진 긴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임 교황대사의 선임자들이 뻬땅원수의 친독 정부의 수도 「비씨」에 대사관을 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레지스땅스」 운동측의 깊은 반감을 산 데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안젤로 주셉베 롱깔리 대주교는 「빠리」에 부임한지 3개월 안에 프랑스가 프랑스의 유명한 가톨릭철학자 쟈끄마리땡을 주「바티깐」 대사로 임명함으로써 성청과 정상적 외교 유대를 회복할만큼 전후 정부의 신임과 친선을 다시 얻는데 성공했다.
롱깔리 대주교는 외교관으로서 이미 굉장한 그의 교우(交友) 명부가 상당히 불었다. 이것은 외교상 형식적인 문서교환에 대한 그의 성격적인 혐오와 착잡한 사태의 완화를 위한 개인적 접촉에 대한 그의 신뢰가 도움이 되었다.
일부 프랑스인들에게 반역자로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경질을 원하는 주교들의 길다란 명단을 제출한 드.골 장군과 그의 초대면은 싸늘하고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롱깔리 교황대사의 동 장군에 대한 다음 여러번 방문과 격의 없는 솔직한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 굳은 우정을 맺는 결과를 이루었다.
롱까릴 대주교가 새로 사귄 친구들의 하나는 로베르 슈만이었다. 그는 늘 『그는 「빠리」에서 함께 있는 사람이 생리적인 평화감을 느끼는 오직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 외의 친구들 가운데 에두와르 에리오트 레옹 볼룸, 안또앙 삐네에, 쥬르쥬 비도우, 앙뜨레 뿔레방과 같은 프랑스의 대정치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외교란 장래의 교황이 일하던 그 분야만이 아니었다. 「빠리」에서의 8년간은 프랑스 공업지대의 비그리스도교화를 막기로 계획된 노동자-사제 운동의 체험과 부합되었다. 이것은 공장에서 노동하고 노동자 주택에서 생활하고 가능한 장소이면 어디서나 흔히 공장의 벤취나 주방의 태이블에서 미사를 올리는 사제들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 시험의 첫번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새로운 사목은 노동자-사제들이 유익한 영향을 끼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환경의 희생자가 되는 위험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눈에 뜨이게 되었다. 사실상 어떤 사제들은 사제직을 떠나 결혼했다. 다른 사제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욕을 먹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2년에 이 운동에 모종의 제한을 가했다.
그러나 마침내 이 운동을 금지하고 노동계급에 대한 새로운 복음화의 방법을 발견하도록 프랑스 교회 당국에 요청하는 일이 비오 12세 교황의 후계자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1945년 롱깔리대주교는 새로 프랑스의 주보로 모시게 된 「리쥬」의 데레사 성녀를 추앙하는 「빠리」의 식전에 참석했다. 1년 후에 그는 전재민에 대한 구호 증가를 계획하는 가톨릭구호위원회의 회의에 임석했다. 동시에 그는 유고스라비아의 공산정부에 의한 자그레브 대주교 스테피나쓰 추기경의 투옥에 대한 공식 항의를 프랑스와 교회명의로 방송했다. 투옥된 동 대주교는 후일에 롱깔리 대주교가 영광의 홍모(紅모)를 받던 동일한 추기원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된 분들의 하나였다.
1948년 동 교황대사는 프랑스와 알사스의 합병 3백년 기념식을 집전했다. 동 식전 중 『과거 2백년간 교회와 프랑스를 위해』 생명을 바친 알사스의 주교들 사제들 수녀들을 추앙하는 동페(銅페)가 제막되었다.
UNESCO의 공식 「바티깐」 참관인으로 있으면서 롱깔리대주교는 1952년 「빠리」에서 열린 동 기관의 제7차 총회에서 UNESCO의 사업을 칭찬하고 전세계에 걸쳐 평화와 화해를 지향한 동 사업을 위한 교회의 최고 관심을 재확인했다.
동 대주교는 1953년 비오12세 교황이 소집한 추기원에서 추기경이 된 24위 주교들 가운데 들어있었다. 교황대사는 그가 파견된 국가 원수로부터 이 추기경 위계의 상징을 받아야한다는 오랜 전통에 따라 그는 프랑스 대통령 방쌍 오리올에게서 홍모를 받았다. 이 식전에서 비오 12세 교황은 롱깔리 추기경을 한달 전에 서거한 카롤로 아오스띠노 총주교의 후임으로서 베니스의 총주교로 임명했음을 발표했다. 프랑스를 떠날 때 새 추기경은 프랑스의 「레지옹드놀」 사령관의 칭호를 받았다.
「베니스」의 신자들에게의 첫 인사에서 롱깔리 추기경은 그는 『정치가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영혼의 목자』로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베니스」을 사랑했고 그 대신에 베니스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본당들을 방문하고(가끔 본당을 보살피는 식모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사제관 안에 들어서면서) 교리방에서는 어린 아이들과 지꺼리고 병원들 및 다른 기관들을 「순회하면서 가톨릭」 악숀이 주최하는 문화 및 오락 모임에 참석하니 그는 얼마 안 가서 사람들에게 눈익은 모습이 되었다.
그의 부하 사제들은 그의 재치있고 이해 있는 대접에 정신을 잃었다.
모두가 깊은 인간성을 내보이는 새 총주교에 관한 많은 일화가 떠돌았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굉장히 뚱뚱한 사람이 그와 몇마디 말이 하고싶어 추기경을 앞질러 서려고 헐떠기면서 쫓아갔다. 추기경은 몸을 들이키면서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 주께서는 특별히 우리 살찐 사람들에게 관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 이유는 그들의 말대로 그는 비오 10세 교황이 되었고 시성된 저 겸손하고 흐뭇하던 쥬셉베 살토총주교의 그날의 기억을 돌이켜주었기 때문이다. 견책하고 나무랄 필요가 있을 때라도 그는 그의 천성인 유모아와 완화의 센스를 잃지 않았다. 하루는 허술했거나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성 말구 대성전에 나타난 어느 여자 관광객을 그는 나무라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누구나 털 외투를 입고 이타리에 올 필요는 없읍니다. 그러나 이타리는 확실히 적도의 밑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적도 밑에서라도 옷차림을 말하면 사자들은 외투를 입고 악어들은 값진 가죽으로 보호되고 있읍니다.』
모든 관용과 사교성의 반면에 도덕의 수호와 또는 교구 신자들의 언행에 관련된 경우에 총주교는 비타협적이었다.
자기 사제들에게 텔레비의 소유를 허가하지 않았던 이유는 많은 신자들의 빈곤과 궁핍과 부합되지 않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 번의 기회에 가톨릭 「악숀」 안에 있는 일부 청년들의 좌익적인 방향을 반대하는 말을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가톨릭 노선의 정당과 공산주의와 연합한 집단들과의 밀접한 합작을 말하는 용어 『좌익에의 개방』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958년 10월 그가 비오12세 교황의 후계자로 당선되던 봉쇄선거장에로 떠나기 전에 롱깔리 추기경은 이미 「베니스」교구 안에 30처의 새 본당과 한 곳의 소신학교를 세웠고 「베니우루트」 및 「레바논」의 마리아 대회에서 교황대리로 봉사했고 총주교구 기록문서를 위한 새 센타 하나를 세웠다.
가톨릭 「악숀」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는 이타리의 8개 도시의 마리아대회에 때를 달리하여 참석했다. 1958년 「베니스」의 영화제동안 그는 배우들과 감독들에게 그리스도교적 및 인간적 윗니을 작품에 부여하기를 권면했다. 그해 3월 그는 프랑스에 가서 성 비오10세를 추종하여 「루르드」에 세운 방대한 지하 대성전의 축성에 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