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角(시각)] 故(고) 요안23世(세) 聖下(성하)의 業績(업적)
2千年史에 燦然
한 歷代에 終焉될 수 없는 일들
발행일1963-06-16 [제379호, 1면]
교황 요안23세 성하께서는 비록 고령에 계셨으나 승하하시기 불과 수주일 전까지 격무를 수행하면서 피곤조차 보이지 않았읍니다.
우리는 근세에 걸출한 영매하신 교황 중의 한 분을 여의고 말았읍니다. 전세계의 지도자 및 유수한 발표기관들이 한결같이 위대한 어른의 장서(長逝)를 역사상 그 유례를 얻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애도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 유덕(遺德)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故) 요안성하께서는 우선 교회 안에 많은 옛 전통 및 관례 등을 전례면에서 복고(復古)하시고 이를 부흥(復興)하셨읍니다. 이것들을 다 열거할 여유를 가지지 못합니다만 친히 「로마」의 본주교로서 병원 감옥 그리고 빈민가를 몸소 찾아가서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로 격려하신 일 등은 분명히 성인의 풍모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저 「앗시지」의 성 프란치스꼬 이래 가장 그와 닮은 분이었다는 평이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5년 전 77세에 교황의 중책을 맡아 성 베드루의 좌(座)에 취임하실 때 혹 한 과도적(過渡的)인 시기를 채우실 분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그러나 그간 수행한 막대한 업적들을 보십시요. 참 그 어느 한 가지도 시의에 적합하고 또 먼 장래를 경륜하지 않은 것은 없읍니다.
요안 성하께서는 재위 중, 9명의 시성(시聖)을 집행하셨읍니다. 직접 임명한 추기경은 40명에 달합니다. 추기경 정족 수 70석을 75석으로 증석했었다가 그 후 87석으로 사상 최대의 추기경단을 구성하셨읍니다. 한 명의 흑인, 일본, 필립핀에서 각 1명을 내신 것은 기억에도 새로울 것입니다. 전교지방에는 14명의 주교들을 임명하셨고 특히 우리 한국에는 자주 독립국의 면목을 중외(中外)에 선양할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대목구를 본교구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서울 대구 및 광주의 3대 교구에 의한 완전한 교계제도를 설정하셨읍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교회사에 길이 새겨야 할 위대한 기념입니다. 요안 23세와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 한 관계만으로서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하께서는 취임초부터 세계평화의 건전한 기틀을 마련하도록 각 지도자들에 호소하셨읍니다. 영국여왕 에리자베스 2세 부처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희랍왕 바오로부처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9세부처 부미볼 태국왕부처 보드왕 베르기왕 부처 그론치 이태리 대통령 드.골 불란서 대통령 아일랜드 및 필립핀 대통령 아드나워 서독 수상 등 그 이름들을 다 열거하기에는 너무나 장황할 뿐이겠으나 그들은 모두 다 요안 성하의 탁월한 인격과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에 귀기울였을 것입니다.
1960년 12월2일 영국 성공회의 「칸타베리」 대주교 죠프레 F.핏셔 박사가 성청을 방문하고 요안 성하께 알현했읍니다. 이것은 실로 4백년래 처음된 일이었읍니다. 영국 성공회 으뜸이 교황을 방문한 것은 아무래도 역사에 대서특필할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읍니다.
이것은 요안 성하께서 구호삼은 교회 재일치에 흠연히 호응해 온 것이며 우선 지도자들부터 그 모범이 된 것이었읍니다. 다음해 1961년 11월에는 미국 「프로테스탄」 감독교회 총회장인 아서.리텐베가 감독의 방문이 있었읍니다. 계속해서 저명한 「프로테스탄」 지도자들의 성청 방문이 줄을 달았던 것입니다.
교회 재일치의 소리가 금년에 새삼스런 것은 아니겠으나 그 가능성을 이렇게 실천하고 추진한 것은 오로지 요안 성하의 탁월하신 지도역량에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요안 성하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안 성하는 재일치의 교화응로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도합 8개에 달하는 교황 회칙 등은 교회와 같이 교회 안에서 생명을 달아 연면(連綿) 그치지 않는 생명의 말씀으로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첫 자리에 두고 논했어야 할 일이며 또한 애석하게도 제2회기에 의한 그 종결을 짓지 못한 미완성의 업적으로 그러나 요안 23세 성하의 대(代)를 장식한 일대 역사이었음을 영원히 기념할 것입니다. 이번 공의회는 1870년 이래 비로소 소집된 것이었읍니다. 그 준비에 소요된 기간만해도 약 4년이란 시일이 걸렸었읍니다. 그리고 보면 요안 성하께서는 재임기의 대부분을 이 공의회 준비 및 그 첫 회기에 바쳤었다고 해서 과언은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2천년 교회 역사상 이처럼 짧은 기간에 막대한 과업을 수행한 교황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겠읍니다. 또 이렇게 비(非)가톨릭 세계에서 정성으로 그 서거를 애도한 일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찬연한 업적들이 단지 요안 성하의 서거로 종언(終焉)을 고한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로마·꾸리아」 내에서는 실은 돌아가신 성하께서 하신 일들은 앞으로 장구한 시일을 두고 그 계시한 일들을 차례로 완성시켜가야 할 더 많은 책임을 암시하고 있읍니다.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모든 교회 정책이 수립될 것으로 생각되는 바입니다.
우리는 서적이나 강론을 통해 교회의 성인 및 학자, 그리고 영걸들을 들어왔읍니다만, 그 모든 품성들을 구유한 한 역대의 교황님을 직접 대할 수 있었읍니다. 이것은 분명히 천주님의 뜻이 진리, 정의, 사랑 및 자유를 가지고 평화의 질서를 회복하도록 계속해서 훌륭한 ㅇ닐꾼들을 보내주시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신 요안 성하를 하늘 나라에 평화의 사절로 보냈읍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교황님을 여읜 슬픔은 좀처럼 가시지 않을만큼 가슴 깊이 못박아 주는 바가 있음을 감출 길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