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 落照(낙조) ②
발행일1962-11-18 [제351호, 4면]
수련이 묵주를 손에 쥐고 바다 저쪽만 지켜보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마지막 해발이 바다속으로 잠겨드는 순간이다.
황금빛 붉은빛 화려한 광채가 한껏 화려하다. 어느 위대한 제왕(帝王)의 임종(臨終)이나 지켜보듯 수련이의 가슴은 설레었다.
『미스 김! 이리 좀 와요』
홍창식의 목소리는 완전히 술주정꾼의 그것이다. 수련은 꿈에서 놀라 깨인듯 몸을 옴칠하며 묵주를 꼭 움켜쥐었다.
『미스 김! 홀로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홍창식의 숨결은 귀밑에 닷고 비위를 거슬리는 술냄새가 왈칵 풍겼다.
『아이 가만 좀 내버려 두세요』
수련이는 벌떡 일어나 창앞으로 바짝 피해갔다.
『오-라! 마침 낙조로군. 그래… 야-참 아름답다. 내가 시인이라면 한마디 읊어서 수련씨에게 바치겠는데…』
마구 덤벼들던 홍창식은 잠시 주춤했다.
이틈을 타 수련이는 몸을 빼쳐 층계로 향했다. 아래층 사무실쪽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뒤를 쫓는 홍창식의 억센 손아귀는 수련의 팔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아-니 가긴 어딜가요. 나하구 이야기나 좀 합시다.』
『이 손 노세요 아파요』
『미스 김! 홍창식은 비록 이름없는 장사치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줄 아는 인간이요! 나를 믿어요』
『어서 이 손 놓고 점잖게 말씀하세요 누가 봐요』
수련이는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꼼짝만 해도 홍창식이가 덤벼들 것만 같아 그대로 서서 배기려는 것이다.
『미스 김은 「남령(南嶺)」같은 술파는 집에는 나가선 못써! 어서 그만두는게 좋아. 내 힘 자라는 대로 도와줄께…』
아닌게 아니라 수련은 빠-「남령」에 나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안양(安養) 뒷마을 어머니한테 갔다 밭긴 미남(美男)이를 기르자니 빠- 아니라 보다 더한 곳에라도 나가야만 했다.
『제 걱정은 그만두세요. 빠-에 나간다구 머 나쁠게 있나요』
수련이는 우선 홍창식의 입을 막으려고 나오는대로 한마디 했다.
『아-니 밤마다 주정꾼에게 시달림을 받아가며… 그래 그게 암치두 않아요』
『직업으로 알면 암치두 않죠.』
『하… 하… 직업이다… 그러지 말어여. 왜 마음에도 없는 딴소리를 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홍전무님은 오늘 어째서 술주정을 하시죠?』
『온 천만에 술주정이라니… 오늘 내 태도가 일개 술주정꾼으로 보였다면 그건 정말 섭섭한데… 내 말 좀 들어봐요.』
『섭섭하신 사정 전 알고 싶지 않어요. 하여튼 여기는 빠-도 아니고… 날가지구 이렇게 하시면 됩니까. 우선 홍전무님부터 저를 빠-에 나간다는 이유로 천하게 취급하시는거 아냐요?』
『온… 천만에 그럴리가 있나.』
『그러면 숙녀에게 대하는 예의를 지켜주세요.』
『그래. 그럼 내 다시는 손목을 잡지 않을게. 예 좀 앉아요.』
『…』
『자- 어서』
홍창식은 또다시 수련의 손목을 잡아끌려했다.
『아이. 또 이러신다.』
서련이는 몸을 빼쳐 층계로 내려갔다.
『글쎄 내 말 좀 들어봐!』
홍창식은 달아나는 수련이를 얼싸 안으려다가 그냥 허공을 안고 엎으러졌다. 그러자마자 층계비탈에서 굴러떨어졌다. 삽시간의 일이다.
『에이 크!』
홍창식은 엎으러진채 꿍꿍 앓았다. 호텔 뽀이와 종업원이 모여들었다. 수련이는 아무말도 못하고 층계옆에 비켜 섰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야?』
진영이가 마침 뛰어들었다. 진영이는 조개가 가득 든 망태기를 마루에 내던지고 홍창식에게로 달려들었다.
『홍전무님! 홍전무님!』
홍창식은 마루바닥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워서 꼼짝도 못했다. 다만 숨결만 높앗다.
『미스 김이 나를 떼밀었어! 난 죽어! 죽는거야!』
『내가 언제 떼밀었어요. 자기가 급히 쫓아 내려오다가 떨어졌지.』
수련이는 소리를 쳤다. 단 둘이서 승갱이를 하다가 벌어진 일이요 게다가 한쪽은 몹시 취했으니 아무래두 입장이 난처했다.
『글쎄 이양반! 혼자 술 실컷 마시구 주정을 하지 않아. 남의 손목을 마구 잡아끌기에 아랫층으로 피해 내려왔더니 아마 비틀거리며 뒤따라 내려오다가 미끌졌나봐』
『어쨌든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잖아.』
진영이는 곧 홍창식이를 안아 일으켰다.
『아래층에도 온돌방이 있읍니다.』
뽀이가 나서서 홍창식을 들며 거들었다.
『글쎄 무슨 술을 혼자 이렇게 자셨을까』
진영이는 혀를 찼다. 다행히 홍창식은 다친데는 없엇다. 꿍꿍 앟는 소리를 하는 것은 엉덩이에 멍이 든 까닭이다. 한바탕 야단이 끝나자 수련이는 곧 일어섰다.
『진영아 난 서울로 가야겠어.』
『아-니 너만 가』
『너는 홍전무님 간호를 해야 하지 않아.』
『아니 내가 왜 이이 간호를 하니.』
진영이는 화를 발끈냈다.
『너는 홍전무님과 미리 약속하고 온 것 아냐.』
수련이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무엇이…』
진영이가 따지고 덤비려는 것을 수련이는 틈을 주지 않았다.
『잔소리말어. 홍씨가 이런데 혼자 올리 없어. 너는 미리 다 알구있지.』
『그래 내가 짜구왔다. 그게 무슨 큰 잘못이냐. 돈 잘쓰고 인심좋은 손님 소개한게 그렇게 원통하냐.』
『넌 아직 날 몰라. 나는 그렇게 함부로 놀아나진 못해.』
『앗다! 네나 내나 술장수 앞잡이 팔자에 무슨 잔소리야. 누가 들으면 웃어.』
『웃긴 누가 웃겟니. 너나 웃지… 우스려거든 실컷 웃어 난 너처럼 마구 놀긴 싫어. …싫은게 아니라 못하겠어.』
『내가 아무리 흰소릴 해도 결국엔 타락하구 마는거야 누군 너만 못해서 술주정꾼의 주머니만 노리구 사는줄 아니?』
『다 듣기 싫어 나는 나대루 좀 내버려 두어… 애들 그러느냐 말야.』
『흥! 누가 네가 이뻐서 그러는줄 아니? 나같이 얼굴이 못생긴 년은 너처럼 이쁜아이 중매나 들어야 돈냥이나 얻으쓴단 말야! 말하자면 뿌로-카란 말야. 지극히 서글픈 신세지.』
어느틈에 맑은 정신이 돌았는지 홍창식이가 꾸물거렸다.
『싸우지 말아요! 싸우지 말래두…』
『홍전무님! 얼마나 아프세요.』
진영이가 홍창식의 옆으로 다가섰다.
『수련이가 간대요 보내두 좋아요?』
『아-니 가긴 어딜가. 내 수…숙녀에 대우 까… 깍듯이 할게 가지 말아요. 미스 윤수련씨 못가게 해요.』
『온 죽어두 간다는 아이를 또 죽어두 붙들라니 난 어떻게 해야 좋담』
진영이는 필요 이상 소리를 높였다.
『저녁먹고 같이 자동차 타구 가요』
홍창식은 고개를 들었다. 눈알이 싯뻘건게 마치 무슨 야수 같았다. 수련이는 또다시 불안을 느꼈다. 홍창식의 눈알맹이에는 실낱만한 맑은 빛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그것이었다.
『이에 이왕지사 이렇게 됐으니 저녁이나 먹구 자동차 타고 같이 가잤구나』
진영이는 은근히 수련이를 달랬다. 어여쁜 동무를 소개하고 용돈이나 얻으쓰려고 애를 태우는 진영의 꼬락서니가 밉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게다가 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버젓이 있는 사람이 송도까지 와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몸이 달아 조바심을 하는 홍창식이가 더욱 처량해 보였다.
그래도 회사에 나가면 어른인체 으젓을 빼려니 생각을 하니 세상이 통털어 야릇해졋다. 사나이란 다 그런것일까?
지금쯤 자기를 버리고 간 곳 조차 모르는 박영진(朴永進)도 어디선가 이와 똑같은 짓을 하지나 않을까. 그런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몹시 어리석은 것 같았다.
『수련씨! 가지말아요』
잠고대 같이 뇌까리는 홍창식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수련이는 또한번 몸을 옴추려뜨렸다.
「얼른 달아나야지 더 있다가는 괜히 큰일나. 어두워지면 가기가 더 힘들걸」
수련이는 얼른 문을 밀고 나섰다.
『어디가니 수련아!』
『아무데도 안가』
복도를 나서며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언덕 길을 사뭇 달음질쳤다.
『수련아!』
진영의 뒤쫓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갔다. 언덕 길을 두 고비 돌고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미남아!』
한숨대신 미남이를 불렀다. 안양에 잇는 아들의 이름이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세살이 된 미남이는 지금쯤 엄마를 부르며 울고있을지도 모른다. 수련이는 발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엇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묵주가 쥐어져 있다. 묵주에는 땀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