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성지순례)] (18) 제세마니 東山(동산) 聖時(성시)에
다시 느껴지는 가톨릭 偉大性(위대성)
발행일1963-06-16 [제379호, 3면]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내려도 오늘밤은 목요일이라 「제세마니」 동산에 성시를 하려 간단다. 매우 좋은 일이요 기다렸던 일이다.
그러나 만리 타국에서 혼자 외로히 누워있어야 할 친구를 가까이서 지켜 위로하지 못하고 뿌리치고 가야 옳을지! 아니면 주 그리스도 당신 십자가의 혹형을 앞두시고 핏땀을 흘리시도록 고민하시던 자리에서 성시를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나의 일생을 통해 두 번 다시 못 얻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를 놓쳐야 할지! 어느 것이 내가 취해야 할 태도인지 심히 망서렸다.
그러니 내 주재에 망부석처럼 친구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친구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옆에 있어봤자 자네한테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성시나 하러 가겠네 용서하게』했더니
『아니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말고 자네나 잘 다녀오게』하면서 쾌히 수락하기에 「제세마니」 동산으로 향했다.
묵상하러 오신 분들은 주교들이신데 묵상을 지도하러 나오신 분은 그곳 수사(修士) 신부이시다. 그러나 모두 경건한 태도로 묵묵히 그 지도를 따르신다. 여기에 가톨릭 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주교와 신부! 신품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가침의 차이가 있는 사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주교님들이 신부님의 지도를 받는다. 진리 앞에서는 노유(老幼)니 장소(長少)니 존귀니 고하(高下)가 있을 수 없다. 모두 적나라(赤裸裸)한 빨가둥이다.
우리 동양 오륜(五倫)에 장유유서(長幼有序)라 함도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할 질서지 진리 앞에서도 얽매여 있으란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진리를 말하는데 계급이 무엇이냐? 비록 세살밖에 안 된 종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옳은 말이라면 만승(萬乘)의 제왕도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대사상(事大思想)이 성리화했는지 우리 백성들의 사고방식들은 어떠한가? 무엇이 말라 「미이라」처럼 썩지 않고 밉살스리 남아있는 것이 권위라는 인식인지 이(理)의 진부를 가리기 전에 소위 권위있다는 사람의 말이라면 마치 한마리 개가 짖으면 온 동내 개가 다 들고 일어나 무조건 멍멍거리듯 하면서도 한 무명인사가 올바른 말을 할 경우 『제까짓게 뭣 안다고』하며 일고(一考)해 보지도 않고 일소(一笑)에 붙이는 못된 습성을 가진 것이 아니더냐? 그렇지 않으면 진리야 어디있건 편견(偏見)과 붕당추종(朋黨追從)의 비열(卑劣)한 심리를 갖지 않았더냐? 실로 한심하고 울어도 울어도 시원찮은 마음씨들이다.
내가 「제세마니」 동산으로 떠날 때는 『시몬아 너 나와 한가지로 한시간을 깨어 있지 못하느냐? 깨어 기구하여 써 유감에 들지 말도록 하라』시던 주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코 밤샘할 작정이었으나 어쩐지 한 시간을 지낸 후 머리가 휙 돌리면서 더 이상을 버티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아직 「로마」로 돌아가려면 한주일 더 남았다. 만일 주옫에서 눕는다면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이를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된다면 나도 큰 일이어니와 인솔자 측에도 큰 짐이된다.
성시는 매주 내고향에서도 하던 신공이다. 여기서 밤샘한다는 것은 따지고보면 일종의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밖에 안된다. 돌아가 자야겠다. 비는 주룩주룩 여전히 내리는데 「택시」 두어대가 대기해 있다가 갈 사람이 있으면 수시로 실어다 준다. 한 시간 후 나는 돌아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