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角(시각)] 敎皇戴冠式(교황대관식) 重要禮節(중요예절)들
미사 끝에 戴冠式
莊嚴禮 갖추어
副祭 樞機卿의 손으로
발행일1963-06-23 [제380호, 1면]
교황대관식의 역사적 고찰.
추기경단의 선거가 결정되고 당선자가 수락하면 그는 사실상 로마의 주교가 되는 것이고 명목상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전세계의 교황이 된다. 그러나 전통으로 내려오는 몇가지 예식이 교황위에 오를 때 동반한다. 오늘 대관식이라고 불리는 그것이 가장 성대하다. 그러나 그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역사적 전후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옛날에는 가장 중요한 예식이 새 교황의 성성식이었다. 우리는 9세기 말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에는 보통 로마의 성직자나 또 가장 흔히 부제가 교황위에 오르는 수가 많았다. 선거 다음 주일 성 베드루의 무덤위에서 주교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까지 사제직 은혜를 충만히 받는 주교 성성식으로 새 교황이 되는 자에게 먼저 사제서품을 수여하는 것이 면제된다고 판단했다.
「로마 전례서」는 새 교황이 선출되는 경우 그는 언제나 「오스띠아」 주교 추기경으로부터 성성식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830년 2월2일에 교황에 선거되고 같은달 6일에 성성된 그레고리오 16세의 경우부터는 반드시 그렇지도 아니했다. 새 교황이 이미 주교인 경우에는 그 즉위식(卽位式)의 예절은 「바티깐」의 「바실리카」에 있는 성 베드루의 무덤 위에 있는 교황 제대에서 교황이 장엄미사를 올렸다. 이 미사에 두 가지 특수 예절을 특기할만하다.
즉 미사 시작 때 「빨리움」을 수여하는 것과 미사 끝에 교황고나을 씨우는 예식이다. 그 예식이 장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론 가장 중대한 것이 이 첫째 것이다. 이 「빨리움」은 로마 교황의 전세계의 행정권을 표하는 것이다. 교황만이 이 권을 전세계에 가질 수 있다. 이 「빨리움」 사용을 대주교에게 허용할 때 그것은 종도의 어좌와 함께 일치한다고 하는 뜻이지 대주교는 어떤 경우라도 그 행정권을 자기 지역 밖에서 가지지 못한다. 부제 추기경장(長)이 교황의 어깨에 「빨리움」을 수여하기 전에 연로한 주교 추기경 세 명이 각각 기도를 올린다. 『당신, 종 XX에게 성신의 은총을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겸손된 성직자로부터 온교회 머리에 올림을 받은 자가 당신의 힘으로 굳게 지탱되게 해주소서』(제2기구문)
그 다음에 부제 추기경장이 『전능하신 천주와 그의 모친이신 지극히 영화로우신 동정녀 마리아와 베드루와 로마 성교회의 복된 종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교황직의 충만을 표하는 이 거룩한 「빨리움」을 받으소서』 한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교황은 그 사제직의 표로 관(MITRA)와 그 왕위의 표로 관(RECNUM)을 가진다고 하였다. 사실 전례예식 때 로마의 주교는 「MITRA」만 사용하고 교황관(TIARA)은 장엄 입당 특히 퇴당행렬 때만 쓴다.
그러나 「아비뇽」에 계셨던 교황들이 쓰시던 삼중으로 된 관(TRIRECNUM-거기서 TIARA란 말이 나왔다.)은 신자들의 눈앞에 중세기 말부터 교황위(位)의 표처럼 되어버렸다. 그것은 십자형으로 된 열쇠와 문장(紋章)으로 되어있다. 이 교황관(TIARA)는 전례 밖에서 쓰는 의관이므로 그것은 새 교황에게 미사 끝에만 쓰여진다. 18세기 중엽까지 대관식은 단순한 예식이었다. 즉 제2 부제추기경이 교황의 관(MITRA)을 벗기고 제1 부제추기경이 그에게 교황관을 씨울 때 신자들은 「기리에·엘레이손」을(천주여 우리를 긍련히 여기소서)을 염했다.
그 후부터 이 예식은 더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즉 주교 추기경단장이 기도문을 창한 후 부제 추기경장이 『삼층관으로 꾸며진 관을 받아라 그리고 너는 모든 제후와 왕들의 아버지시요 세상의 지도자시요 지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심을 알라 그 예수께 영예와 영광이 세세로 있어지이다』하면서 교황에게 관을 씨운다. 그러면 교황은 교황관을 쓰고 로마시와 전세계에(URBI ET ORBI) 교황강복을 베푸신다. 중세기에 교황의 주교성성 예식이 끝나면 성 베드루 대성당 앞 광장에서 교황관을 받았다. 그것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시기 위함이 아니고 장엄한 행렬로 「라떼란」대성당에 가시기 때문이었다.
즉 새교황은 턱에 끈을 드리운 고귀한 인물들이 모는 흰 이륜차를 타시고 추기경단과 모든 로마성직자들을 앞세우고 여러 거리의 시민들이 인사하는 가운데 유명한 교황거리(VIA RAPALE)를 따라 로마시를 횡단한다.
「라떼란」에 도착하면 그는 주교어좌에 착좌한다. 「곤스단딴」이 세운 이 존경하올 「바실리까」가 로마와 전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라면 그것은 그 대성당 후진(後陣)에 베드루의 후계자들의 어좌인 교황의 「까테드라」가 서있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교황들은 대관식을 올린 후 2일 이내로 「라떼란」에 취임하는(POSSESSO) 습관이 있었다. 레오 13세부터 비오 11세까지의 역대 교황은 「바티깐」에서 임의의 수인(任意의 囚人)이 되어 대리자를 보내기만 하셨다.
1939년 5월18일에 비오 12세가 옛 전통을 장엄히 새롭게 했다. 이번에 돌아가신 요안 23세도 라떼란의 LOGGIA(開廊)에서 교황 어좌에 안증신 후 세계를 강복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