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 예수께서 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바리서이」와 학자들은 원망하며 『이 사람이 난류배들을 사귀어 한 가지로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난류배를 죄인으로 몰고, 죄인을 미워하는 그들의 잘못을 아름다운 비유로써 깨우쳐주시며 죄인에 대한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밝히면서 난류배를 위로해 주십니다.
「바리서이」 아닌 사랑이라도 천주께서 정말 죄인을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을 품을 수 있읍니다. 천주께선 두 말 할 것 없이 당신 계명을 지켜 착하게 사는 선인(善人)을 사랑하십니다. 오래도록 죄악에 젖어 있었으나 통회하며 회개하는 자는 사랑하시겠지만 지금 당신을 미워하며 수모(受侮)케 하고 능욕하는 악인을 사랑하실는지? 성 아오스딩은 죄악은 미워하지만 죄인은 어디까지나 사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이와 반대로 죄악은 사랑하면서 죄인에게는 용서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직도 저 「바리서이」처럼 난류 배를 물리치라고 야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인자하신 구세주는 그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구세주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여기시어 양 백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으시면 아흔 아홉마리를 광야에 버리시고 한 마리를 찾기까지 마음을 놓치 않으시다가 찾으매 어깨에 메어 집에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같이 반가와 하십니다.
또 어떤 부인처럼 은전 한 푼을 잃으니 섭섭하여 참지 못하고 등부을 켜 온방을 비질해서 찾으면 기뻐서 이웃과 벗을 청하여 서로 좋아함같이 그리스도는 죄인의 회개를 반가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신데도 불구하고 먼지같은 인간이 어리석게도 달려드는 것을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골짜기를 건너 숲속으로 헤매시며 찾게하시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무한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 보존하는 사랑이요 구속(救贖)하는 사랑입니다.
▲창조·보존하는 사랑=『저 사람이 저럴줄 알았으면 애당초 상대도 안하는 것을』이라고 동업(同業)하던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거나 굳게 믿던 친구의 배신을 받았을 때 인간이 한탄하는 까닭은 죄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상대도 않겠다는 말은 인간 취급도 안하겠다는 것이며 자기 눈에 띄지도 말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얻은 사람을 보기 싫어하고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 없읍니다. 창조하시기 전부터 어떤 인간은 그 무한한 사랑을 뿌리치고 배신하여 세물(世物)이나 사욕(私慾)이나 마귀에게 가담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천주께서는 그를 창조해 내십니다. 우리 최대의 선물인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애당초 알았으면 상대도 안하겠다는 얇은 마음을 안 가지고 계십니다. 창조하시는 천주의 사랑이 무한하다면 보존하시는 사랑도 무한합니다. 만일 소경에게 빛을 보여주고 앉은뱅이를 걷게 해주고 미친 사람에게 옳은 정신을 돌려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이겠읍니까?
잠시라도 천주께서 돌봐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보지도 걷지도 올바른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탐욕을 내어 여자를 보아도 눈이 상하지 않고 훔쳐도 손이 꺾이지 않고 복수심을 품어도 미치지 않은 것은 천주께서 용서하며 우리를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불타는 깊은 구멍에 떨어지려는 우리를 부축해주시는 천주의 손을 깨물며 놓으라고 울부짖는 우리의 꼬락서니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구속(救贖)하는 사랑=벗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랑보다 큰 사랑이 없답니다. 이러한 사랑이 지상에 전혀 없지는 않으니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모친이 있는가하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위인(偉人)이 있읍니다. 마는 원수를 위해서, 죄인을 위해서 생명을 기꺼이 바친 사람은 성 바오로께서 증명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없읍니다. 무거운 십자가에 눌리어 핏땀을 흘리시며 「골고타」산을 향해 올라가실 때에 길거리에 서 있는 많은 사람을 보시니 어떤 이는 무관심한 얼굴을 다른 이는 호기심에 찬 얼굴을, 또 다른 이는 미워하는 얼굴을 짓고 있읍니다.
그들을 보시고 딱하게 여기셨지만 마음 속으로는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여 내 몸과 피를 바치노라』고 하셨읍니다. 마귀는 우리 목에 죄의 칼을 대고 있었읍니다. 그리스도는 마귀를 쫓고 그 칼을 빼앗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그 칼을 다시 얻어 그리스도를 위협하니 정말 딱한 일입니다. 장차 이렇게 배신할줄을 아시면서 구속해주셨으니 죄인에 대한 사랑이 크다 아니할 수 없읍니다.
▲선도(善導)하는 사랑=천주께서는 죄인의 뒤에서 『이것이 길이니 너희는 이를 따라가거라』고 선도하십니다. 끊임 없이 그들의 뒤를 쫓아 따르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의 가책(苛責)을 일으켜 『내 사랑을 이해 못할지언정 너희들의 망신을 생각하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어떤 때는 선인이 악인의 행복을 보고 불평할 만큼 죄인을 강복해 주십니다. 행복으로써 그의 회개를 꾀하시는 사랑의 처사(處事)입니다.
또 어떤 때는 불행을 내리시니 죄인이 실패하고 병들고 수모를 받습니다. 세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의 마음을 떼어놓으시려고 일부러 세물(世物)을 쓰게하시는 연고입니다. 조그마한 우리들이 위대한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읍니까? 길을 잃어버렸던 우리를 업어주시고 방에서 분실했던 우리를 안아주시니 행복치 않을 수 있겠읍니까?
盧景三 神父(꼰벤뚜일 성 프란치스꼬회 대구 범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