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부터 교회는 전례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교회는 성가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기를 끄치지 아니하였다. 음악적 전통이 아무리 변천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이 신비의 확실한 해석의 원천과 그 신비 거행의 규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음악이 어떻게 신비의 해석의 원천이 될 수 있느냐?
옛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문과 「멜로디」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면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요소를 같이 연구함으로써 서로 분리해서 해석하기를 피하면서 우리와 남을 위하여 전례적 성가 가운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리적 영성적 이익을 찾아보도록 하자. 거기에 교회의 전례적 생활과 행동의 가장 오랜 표현이 있음이 확실하다.
이 표현이 우리 영혼과 마음의 그 무엇을 반영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①기도문. 교회가 성탄이 가까울수록 더욱 힘차게 고대하고 희망하는 「메씨아」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이시다. 즉 이 세상의 주인이시다. 「우리 주」라는 천주다운 칭호를 「천주」로 대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들이 넉넉지 못하여 영광스러운 명칭들을 더 붙였다.
그는 『왕, 영광의 왕, 왕의 왕, 평화의 왕, 평화의 군주』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구세주」시다. 왜냐햐면 그의 내림은 이 세상에 큰 광영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회가 『우리를 구하기위하여』란 말을 자꾸만 거듭한다. 이 말은 『우리를 생활케 하시기 위하여 지상이 악을 없이 하기 위하여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오신다.』로 발전한다.
이것은 한말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기쁨이 넘친다. 『용약하라 즐거워 하라 기뻐하라』란 라띤어가 올리는 이 단어들은 희열의 뜻을 드러낸다.
②멜로디 그러나 이 모든 감격은 우리가 고대하는 정확한 목표에 착각을 가져올 수 있고 성탄이란 통속적인 축일이 임박함으로 인해 단순히 일으키게 되는 너무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 모든 성가의 기쁨을 느낄 위험이 있다. 이것은 한가지 과오이다. 그러므로 성가의 「메씨지」는 교회의 전통적인 영성 속에 깊이 들어가도록 우리를 도와야 할 것이다.
A, 주의 재림, 이에 대한 우리의 희망의 각도는 민요를 부르는 견식을 무한히 초월해야 한다.
그리하여 장림의 모든 성가를 통하여 흐르는 기쁨은 성탄 노래 조(調)와 매우 다른 무게있는 조(調)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다. 우리는 영원한 그의 왕국의 영광 속에 결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 이 희망이 신자 생활의 근본적인 태도요 매일 주님이 오실때까지 그의 죽음을 고하고 『주 예수여 오소서』하고 주님의 얼굴을 다시보는 열렬한 희망 속에 성요안과 함께 탄식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생활이다.
B, 교회. 구세주가 싹터야 할 준비된 땅은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생각이 장림의 노래를 이해하게 하는 둘째 해석이다. 「메씨아」를 영접하는 이는 거룩한 백성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이스라엘」로 상징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조들의 마음속에 어떠한 감격과 사랑을 그것이 일으키게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이름이 나오는 모든 성가에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요 그 사상을 강조하는 작곡가들의 의식적인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가끔 미묘하나 그러나 매우 솔직한 구조를 통하여 그 사상을 이해하고 특히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속에 들어가게 하는 음악적 표현의 광명을 보도록 해야할 것이다. (申相祚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