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에 간단히 말한 바 있었지만 1866년 대원군 시대의 최종 박해시에는 주교 2위 신부 10위가 전교하여 23,000명의 신자가 있었다. 동년에 러시아인들의 불법침입사건이 일어나 한때 국내가 소란하였다. 대원군은 주교신부를 통하여 불란서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무례를 제거할까 하는 일시적 계획을 세웠다가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물러가게 되고 때마침 중국에서 천주교와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한다는 풍문이 돌게되어 대원군의 근본 정책인 쇄국주의가 그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대학살을 감행케 하였다. 돌변한 대원군은 주교신부들과 천주교를 박멸할 흉계를 가슴에 품고 1866년 봄부터 시작하여 그가 실정(失政)하게된 1873년까지 8년동안에 네차례로 대학살의 참극을 빚어내어 주교 2위 신부 7위를 죽이고 만여명의 신자를 학살하였다.
박해의 첫번 동기는 무모한 그의 쇄국정책에 있었지만 외국인 학살사건을 기회로 하여 불란서 미국 독일인 러시아 함대들이 빈번하게 침입하여 혹은 침략 혹은 통상요구 혹은 분묘발굴 등 소동을 일으키는데 극도로 자극을 받은 대원군은 그 양인들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가위 쫓겨가듯 한 뒤에 그 만만한 분풀이를 전부 천주교도에게 풀게되어 이와같은 무서운 결과를 빚었고 천추만대에 씻지못할 폭군의 낙인(烙印)을 받게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에 당면하여 80년동안에 갖은 박해속에서 신음하던 우리 신자들은 신교자유를 유일한 목적으로 알아 한 때는 대원군에게 속아 농락도 당하였고 목자들을 또 다 잃었으니 서양배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에 일루의 희망을 걸고 암암리에 그들과 접근하여 동분서주하는 맹활동을 전개하여 신교자유를 도모하며 조국의 문호를 개방시켜 신문화를 끌어들이는데 제물(祭物)이 되고 희생이 되어 23,000명 교도의 절반수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많은 순교자 수에 대하여 우리나라 몇몇 역사가들은 3만아니 15만이니 과창적 숫자를 추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 교도의 총 수가 2만3천명이 확실하니 그렇게 될 수는 없어도 나라의 여러 문서와 여러가지 참고에 의하여 만여명이란 숫자는 거의 확실하다.
대원군은 갖은 악랄한 방법을 다하여 천주교 박멸책을 썼으니 『선참후계』(先斬後啓)를 명하여 무조건 죽여놓고 정부에 보고하게 하였고 그 전 교난때 쓰던 오가작통(五家作統)법은 물론 길거리와 산속을 뒤져 조금이라도 수상해보이는 사람이면 무조건 천주교도라 인정하고 잡아 수십명 수백명 집단학살을 감행하여 그들의 피로 서양놈들의 더러운 발자국을 씻어 없앤다 하였고 구덩이를 파서 수십명씩 생매장도 하고 불란서 혁명 당시에 쓰던 「길로띤」식 형틀을 만들어 수십명씩 타살하는 등 전무후무한 학살 방법을 썼다.
그래서 그들의 신원과 성명과 순교한 장소 년월일을 알 수 없고 나라문서에 대강 적힌 것을 여기 그대로 간추려 실리기로 하였다.
끝으로 통분한 것은 이 만여명의 순교자들 중에 시복(諡福)조사에 오른 분이 불과 25인밖에 되지않는다 하니 물론 천주께서는 알으시겠지만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의 안타까움은 어디다 호소하랴? 필자는 통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을 적어 독자여러분께 호소할 뿐이다.
◎11月◎
▲5일(1801년)=황사영이 백서를 휴대한채로 충청도 제천(堤川) 옹기굴에서 잡힘
▲6일(1868년)=김안드레아(再九 42세)와 그 동무 3인이 양화진(楊花津)에서 순교
▲8일(1801년)=황사영이 대역부도죄인으로 서울의 금부로 압송됨
▲10일(1866년)=최수(崔수), 김인길(仁吉), 김진(振), 김진구(鎭九), 원요왕(同知) 등이 양화진에서 참수됨
▲12일(1813년)=충청도 공주인 황 바오로가 해미(海美)에서, 덕산(德山) 인장 마지아가 공주에서 각각 참수됨.
▲14일(1801년)=동정부부 이누갈다의 남편 유요안(柳宗善)과 그 아우 요왕(文喆)이 전주 옥중에서 교살됨.
▲동일(1827년)=경상도 상주 양반 박 마오로(朴堅華) 대구감영에서 71세로 옥사함
▲15일(1866년)=강명흠(姜命欽) 황기원(基元) 이기주(基柱) 이달 10일에 순교한 김진(振)의 처 김씨 등이 양화진에서 참수됨
▲동일(1868년)=전라도 고산(高山) 라리실 회장 장 야고버(允京)가 37세로 여산(여山)에서 참수됨
▲16일(1866년)=김 바오로(善亮) 57세로 해미에서 참수됨
▲19일(1812년)=장 어둔남(張於屯南)과 그 노복 김덕(德)이 해미에서 참수됨
▲20일(1866년)=이용래(龍萊) 원후정(厚正) 박성운(聖云) 등이 양화진에서 참수됨
▲20일(1813년)=원 베드루와 그 동무 3인이 공주에서 옥사함
▲동일(1866년)=전 마리아(혹 데레사)가 50세로 전라도 여산에서 참수됨
▲22일(1866년)=박 베드루 양화진에서 참수 그의 고모할머니 박 막다레나가 옥에서 교살됨
▲23일(1839년)=복녀 유 세시리아(丁夏祥의 母) 옥중에서 79세로 순교함
▲동일(1866년)=정연순(連順) 원윤철(允哲)이 통진읍 순무진(通津邑 巡撫鎭)에서 참수됨
▲동일(1867년)=이재현(李再鉉) 군문(軍門)에서 참수됨.
▲24일(1868년)=경상도 함양인 김도마(62세)와 그의 종질 안드레아, 야고버, 방지거, 베드루 등 4형제와 종손 마지아와 오 유리아나, 박 베드루, 이 비리버 등이 전라도 여산에서 참수됨
▲25일(1838년)=복자 이 베드루(浩英=36세) 옥사함
▲26일(1866년)=박 방지거(春貞=56세) 해미에서 참수됨
▲27일(?)(1838년)=김대건의 동반신학생 최방지거 「마카오」에서 객사함
▲28일(1801년)=백서(白書) 밀사 황도마 참수됨
▲29일(1866년)=김 노렌조(聖煥=78세) 청주에서 참수됨
▲11월중(1868년)=한 요왕(交永=27세) 그 아내 손 막다레나(=27세) 전라도 여산에서 참수됨
志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