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3) 落照(낙조) ③
발행일1962-11-25 [제352호, 4면]
어느덧 해도 떨어져 가고 땅거미가 자욱해졌다. 수련이는 호젓한 산마루에서 불빛이 보이는 송도 거리를 향해 내려섰다.
그렇게 떠들석하던 거리는 잠잠해졌다. 뻐스 타는 곳에도 사람이 얼마 없다. 그렇게들 끟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뻐스에 올라앉아 인천 시중으로 가는 동안 수련이는 줄곧 눈을 감고 앉아갔다 오늘 겪은일을 되씹어 보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께름한 것은 진영이다. 진영이는 자기를 남령 「빠」에 소개해준 사람이요 처음 들어가 돈이 웅색할 때 일수노이하는 아주머니까지 불러준 고마운 친구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팁」을 후하게 주는 좋은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지 해서 수련이를 끌어다 앉혀주기도 했다. 술이 한잔 얼근해지면 언제나.
『수련아! 난 네가 좋아. 너는 내가 맡았어!』
하며 수련이를 얼싸안고 맴을 돌기가 일수였다. 무엇이 좋으며 맡기는 무엇을 맡으려는지 따져보지는 아니하였지만 진영이의 우정만은 달가웠다.
손님 곁에서 한창 수다를 피우다가도 수련이만 나타나면 의례껀 손님의 옆자리는 수련이에게 내주고 자기는 일어섰다.
『사장님! 우리 미쓰 김 많이 사랑해 주셔요. 인물 곱고 마음씨 곱고 품행까지 고은 아가씨랍니다』
이렇게 떠들고는 슬쩍 한눈을 끔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례껀 사장이라 불리우는 술손님은 수련이를 바짝 끌어앉히며 즐거이 웃었다.
수련이는 손님의 무지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진영이의 호의만은 감사히 여겨왔다.
그러나 오늘 뜻밖의 일을 겪고보니 그 모든 호의가 동무를 이용하여 자기의 수입을 보태자는 장삿속이었음이 밝혀지고 만 것이다.
『세상에 인물 고은 동무를 주정뱅이에게 중매들고 그 수고값을 받는 직업도 있구나.』
수련의 감고있는 눈동자에는 능청을 떠는 진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기 싫은 얼굴이다. 비굴한 웃음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수련이는 곧 눈을 썼다. 진영이의 얼굴을 지워버리자는 것이다.
어느틈에 뻐스는 인천시중에 들어섰다. 화려하게 몸차림을 한 젊은 여자가 두명 올라탔다. 아무리 보아도 외국군인을 손님으로 하는 술집 아가씨이다.
둘이서 마주 보고 무엇인가 속삭이다가는 크게 웃는다. 수련이는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몹시 계면쩍어졌다. 더우기 의기양양하게 웃어대는 두 여인을 멸시하는 눈치로 흘겨보는 승객들의 눈총을 느낄 때 수련이 자신의 얼굴이 확끈했다.
『내가 어쩌다가 「빠」에를 나갔던가』
가슴이 아팠다. 지금에 와서 진영이의 꼬임에 빠져 잘못을 저질렀다.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기가 뿌린 씨는 역시 자기가 거두어야 한다.
어느곳에 나아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 하나만 올고즈던 그만이라는 작은 아씨같은 수월한 생각이 수련이를 술집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겪고보니 마음하나 올곧게 지킨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기가 막혔다. 그래도 이왕 발을 들여놓았으니 견디어 보겠다는 생각에 하루이틀 미루어 온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술파는 집인지라 술을 즐기는 이가 모여드는가 했더니 그들은 술 외에 또 한가지 어여쁘고 젊은 여자를 희롱하러 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술을 마시러 오는게 아니라 술파는 아가씨를 만나려고 오는 이도 있다. 수련이는 요사이 술대신 인물을 팔려는 주인의 영업정책의 앞잡이격에 오른 것이다. 수련이로서는 생각지도 않던 일이다.
술주정꾼의 짓궂은 농담쯤 어떻게든지 격고 지내면 되리다. 생각한 것이 인제는 인천 송도까지 유인을 하는 끈덕진 공세까지 나타나고 보니, 수련이는 몸서리가 났다.
더우기 기가 막힌 것은 진영이의 태도이다. 그는 조금도 잘못했다는 기색이 없다.
『좋은 손님 중매해주면 으리껀 손님에게는 「팁」을 두둑히 받고 동무에게는 고맙다는 선물을 받는 법이다.』는 듯이 태현하였다.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술집이란 술맛보다 어여쁜 아가씨를 더욱 중요히 다루는 직장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해.』
미남이가 있고 기다리는 남편이 있어 언제나 수련이는 아들과 남편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이다. 소식이 끊긴 남편이야기 언제 돌아올지 기약 못하지만 미남이는 지금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서울에서 어머니가 밤을 낮삼아 기막힌 돈을 갔다주는지 알리 없으니 언제나 엄마품에 안기면 떨저지지 않으려 했다.
『엄마! 오늘밤 나하구 같이 자구 내일 가 응! 밤에는 볼 일 없잖아』
낮에 자고 밤에 일하는 서글픈 어머니의 일을 미남이가 알리가 없다. 게다가 어머니 마저 속도 모르고.
『이얘 수련아 어린게 에미 그려 보채는 꼴 정말 가여워, 오늘은 미남이 허구 하루밤 자구 회사에는 아침 첫차 타고 가려무나』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련이는 가슴이 아프고 얼굴이 화끈했다.
『오냐 오늘은 안양가서 미남이와 함께 자리라』
뻐스를 내릴때는 곧장 안양으로 달려갈 생각에 잠겼다. 인천에서 안양으로 가려면 영등포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야했다. 수련이는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같이 서둘렀다.
잠시 비켜났던 미남이 생각이 되살아 난 것이다. 수련이가 안양읍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밤도 깊었다. 안말까지 들어가려면 십오분은 걸린다. 캄캄한 두메실을 혼자 걷기가 몹시 고적했다.
수련이는 우선 미남이가 좋아하는 양과자를 한봉 사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담배를 몇갑 샀다.
『미남아! 미남아!』
대문앞에 이르러 문을 흔드니 미남이가 뛰어나왔다.
『엄마요!』
엄마의 목소리를 첫마디에 알아듣는 것이 몹시 대견했다. 이세상에서 누가 나를 이렇게 반가워하랴 싶었다. 벌써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나다 나야』
『할머니… 엄마야!』
대문고리가 높아서 미남이 손으로는 열 수가 없어 할머니를 부르는 것이다.
『밤늦게 웬일이냐』
어머니가 발바당으로 뛰어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미남이는 엄마 품에 덜컥 안겼다.
『엄마!』
『잘있었니…』
『잘있는게 다 뭐냐 자구 새면 에미 보구 싶다구 보채는게 일인걸.』
늙은 어머니는 혀를 찼다. 수련이가 서울서 무슨 일을 하고 돈을 벌어다 주는지 그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좀더 자주 와보지 않는다는 넉두리이다. 밤늦도록 술심부름 술주정바지에 시달리고 나면 이튿날 아침에는 마치 중병치르고난 환자같이 전신에 맥이 풀려 꼼짝을 못하는 것이 수련이의 일과이다.
『인제 좀더 치어나면 괜찮아져.』
곁방에 사는 미자(美子)가 보기에 딱했던지 이런 소리를 한 일이 있다. 그러나 본시 몸이 부실한 수련이에게는 좀더 치어나면 괜찮아질 때가 어느때인지 까마득 했다. 밤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밝는날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미남이를 보러간다고 벼르긴 하지만 자리에 누우면 좀처럼 일어나기가 힘이들었다.
그 사정을 털어놓치 못하니 수련이의 가슴은 터지리듯 하였다.
『미남아! 오늘은 엄마하고 할머니하고 셋이 같이 자.』
『아이 좋아 할머니 오늘은 엄마하구 같이 잔다.』
미남이는 엄마의 손을 꼭 쥐고 방까지 들어왔다. 미남이를 위해 사다준 책상위에 도화지며 「크레온」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아니 이게 누구 얼굴이냐.』
수련이는 벽에 부쳐놓은 그림을 주시했다. 분명 미남이가 그려 붙인 것이다 여자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이다. 여자의 얼굴은 수련이려나와 또한 사나이의 얼굴은 생각도 못한 그림이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길렀다.
『미남아 이건 다 누구 얼굴이냐.』
『이것은 엄마!』
『또 이것은…』
『아빠!』
『머 아빠?』
『응!』
『너 아빠 얼굴 보기나 했어.』
『꿈에 본 아빠야!』
『꿈에?』
『그렇단다 미남이 꿈에 보이는 아빠 얼굴이래』
『엄마! 이 얼굴 아빠 같으우!」
수련이는 참다못해 미남이를 덜컥 얼싸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