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世(세) 프로필
北伊 名門서 나와
25歲에 外交官 歷任
비오 12世 오른팔
한 때 樞機卿 任命을 辞讓
敎會一致에 큰 關心
公議會에 가끔 言及
발행일1963-06-30 [제381호, 1면]
성 베드루 수종도의 제262대 후계자로 선출된 바오로6세 교황의 몸집은 수척하고 키는 중키요 눈동자는 푸르고 얼굴빛은 훤하다. 그는 1897년 9월26일 이태리 「브러스치아」 교외의 「콘체시오」에서 국회의원을 3차나 지낸 그 지방신문 편집국장의 아들로 탄생했다.
「미라노」의 교황직속 신학교에서 교회법학박사 학위와 「로마」의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사제로 서품되기는 1920년 5월29일이었다. 그 후 본당 신부로 잠시 있다가 「바티깐」 외교관 양성소인 로마의 교회학원에 입학했다.
1922년 「와르샤와」 주재 교황대사관의 속관으로 비오 11세에 의해 임명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1년 후에 그는 다시 이태리 가톨릭 악숀대학부의 교회측 보좌로 임명되었고 나중에 그 지도자가 되었다.
1932년 35세 때 그는 「바티깐」 국무성의 서기관으로 비오11세 교황에 의해 임명되어 4년 후에는 동 국무성의 차관으로 승진되었다. 이 지위는 비오12세 교황이 교화응로 피선되기 전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1953년 비오12세 교황이 24위의 추기경을 임명할 때 몬띠니 몬시뇰과 따르디니 몬시뇰을 추기경으로 임명할 계획을 밝히자 그 두 분은 한 가지로 사퇴했었다.
국무성성에서 30년의 근무를 마친 그는 1954년 11월 「미라노」의 대주교로 전출한지 4년만인 1958년 12월15일 요안23세 교황에게 제1차로 추기경의 임명을 받았다.
그는 1955년 1월6일 「미라노」대성당의 주교좌에 정식으로 착좌하자 1천개소의 본당을 순시하는데 2개년을 소비했다. 「미라노」대교구는 신자수가 3백75만을 넘는 이태리에서 가장 큰 교구인데 그가 부임 직후에 새로 세운 교회는 45개소에 이르렀고 1957년에는 교회가 40개소나 더 필요하다고 말하더니 다시 2년 반 후에는 69개소가 또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미라노 교구에는 교회 건설의 붐이 일어나 도시의 고층 건물 「아파트」의 중심에는 소성당을 설치하게 되었고 방세에는 소성당 유지비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태리에서 유일하고 최대의 근대 공업지대인 「미라노」 교구에서 그는 짙은 숲이나 다름 없이 총총하게 높이 솟은 공장 굴뚝이 토하는 검은 연기가 하늘빛을 가리는 분위기 안에서 그는 언제나 기계 소리 시끄러운 공장에로 노동자 방문을 자주 잊지 않았다.
그가 부임한 후 「미라노」 지대의 공산당원 수가 한해 한해 감소되었던 것은 세속 신문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사실이며 노동 「캡」을 쓰고 자동차로 「미라노」 거리를 달리는 모습도 보도 사진에서 본 기억이 새롭다.
정치 및 언론인의 아들로서 그는 외교는 물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은 필연적이라 하겠고 약 10년간이나 가톨릭 「악숀」의 대학부를 지도한 그인만큼 평신도 사도직 특히 지성의 지도에 과감할 것도 짐작되는 바이다.
1957년 이태리 청년운동 시작 90주년 기념연설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사랑을 가지고 새로운 생활분야를 침공함은 청년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정신방위가 부족하다- 거기에는 정복이 있어야 하겠다』라고 투지만만한 언사로 말했다.
특히 요안23세 교황이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소집하기 5년 전인 1957년에 그는 비가톨릭에게 대한 포섭적 태도의 중요성을 지적하여 『우리는 갈려간 형제들에게 커다란 사랑의 느낌을 함양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네들에게서 무엇인가 배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10월에 공의회가 열리던 1962년 1월에 그는 공의회의 예언과 같은 성명을 하여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있는 이 슬픈 분열상태를 변경할 어떠한 새롭고 굉장한 기회가 오기를 우리는 충심으로 희망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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