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림 첫 주일에서부터 교회의 새해가 시작됩니다. 교회와 함께 일년을 지내는 것은 우리들에게 무슨 뜻이 있을까?
오늘 강론에서 교회의 전례적(典禮的) 역년(曆年)과 그의 참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전례(典禮)는 미사 거행과 성사 집행과 경본(經本)과 성체강복만을 말하는 것이고 이외의 것은 전례에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일년동안 여러가지 첨례를 지내고 있느냐?』고 교우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 여러가지 첨례는 과거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우리들은 그 사건(事件)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천주의 중개자』란 회칙(回勅)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읍니다. 즉 『예전적(禮典的) 역년은 희미하고 무생활(無生活)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적 기록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 안에 살고 계시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몸소 시작하셨던 무한한 자비의 길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영혼을 당신의 신비(탄생 부활 등)에 접촉 시키기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신비(神秘)들은 현재에도 항구적으로 활기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신비들은 각각 천성적(天性的)이며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 구원의 원인이다』(M.D. 165)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와 죽음으로써 쌓아놓으신 성총을 우리들은 그 무슨 창고에서부터 미사와 성사를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오 12세 성하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예전적인 행사(行事) 안에 계시고 그 안에서 직접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사(聖事)를 생각할 때 아래서부터 보지아니하고 위에서부터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말씀을 들어보면 『예전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머리(그리스도)와 지체(영세한 이들) 들이 예배하는 것이다.』(M.D. 21)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使徒職)은 생활하며 대대로 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는 현실(現實)인 것이다.』(M.D. 21) 또는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매일같이 활동하는 것이다.』(M.D. 29) 그러면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가 무혈제(無血祭)로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분할(分割)해서 생각할 수 없읍니다. 또 미사때 성변화(聖變化) 후 경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만 아니라 그의 승천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일생의 모든 사건은 우리들이 구속사업의 중요한 부분이며 미사성제를 거행할 때 마다 모두다 활발하게 호팜되어 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는 『예전은 완전한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내 주는 것이다.』(M. D. 162…163)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또한 우리를 구속시키는 그리스도의 행적(行跡)을 미사때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다시 새롭게 이루어지고 그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지금에도 우리 구속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래서(원래) 초대 교회는 그 첨례 안에 완전하게 다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읍니다. 그 후로 차차 성탄 승천 성신강림 등 다른 첨례들을 더하게 되었읍니다.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신비들은 있고 활기있게 뻗어나아가는 것이다. 그 신비들은 우리 구속사업의 특은을 우리들에게 각각 나누어 줌으로써 현재에도 감화를 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뜻은 서로 협력함으로써 나무가지가 나무에서 지체(肢體)들이 머리에서 생활력을 받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로부터 생활력을 받는 것이며 천천히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N. D. 165)
그러니까 우리의 성화시키는 일은 우리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전례를 통해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 상태를 살펴보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전례에서부터 너무나도 떨어져나간 감이 듭니다. 그 점에는 사회생활 전례적(典禮的) 율동(律動)과 정신에 따라 움직엿던 것입니다. 즉 일하는 시간이나 노는 시간이나 또는 상장(喪葬)때나 경축일에 더구나 극장이나 박람회의 개회식까지도 전례에 따라 순환했었읍니다.
만일 전례가 보통 생활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면 그 전례는 너무도 인위적이며 형식적이 될 위험이 많습니다. 그와 반대로 각국의 풍속과 견주어 볼 때 교회의 역년이 그 사회적 풍속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갈 필요가 있겠읍니까?(추사이망 첨례는 왜 한국의 풍속인 추석날에 지내지 않고 따로 지내야만 합니까? 또 연미사 때 한국의 풍속을 따라 상복을 입지 않고 검은색 제의를 입어야만 합니까?) 오히려 교회는 그 나라의 풍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함으로써 그 풍속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대대(代代)로 각 나라의 문화와 접촉해서 교회적인 풍속을 이루어 우리의 가족이나 학교나 본당에서 그 풍속에 따라 교회의 역년을 지낸다면 전례의 정신이 목적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사회와 교회는 병행(並行)하면서 나중에는 융화되어 온 세상이 그리스도화 하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장림때에 들어서서 교회의 정신대로 산다면 우리는 기쁘게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예전적 기도를 사용해야 하겠읍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요안 세자와 성모 마리아 이 세분의 지도자를 따라서 우리는 장림때 오면 『구세주 빨리오사』와 『로라때』를 노래하면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고 또한 재림을 자기생활의 풍속으로서 기다려야 하겠읍늬다. 그 풍속의 하나를 들어보면 「장림화환」입니다. 장림화환은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향나무 잎이나 사철나무 잎으로 둥근화환을 만들고 그것을 뉘어놓은 다음 초 네개를 알맞게 세워 놓는데 될 수 있으면 자색초 세개와 장미색초 한개로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와같이 세워놓은 다음 더 아름답게 꾸미려면 그 초의 색에 맞추어 「리본」을 대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서 자녀들 중 딸이나 여자들이 이런 화환을 간단하게 만들어 놓고 장림 각 토요일마다 식구들이 만과경을 통경해서 바칠 때 그 집 가장(家長) 즉 아버지가 그 주일날의 미사축문을 외우고 나서 맏아들로부터 내려오면서 한 주일에 한 초씩 점화시키는 것입니다.
촛불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켜져 감으로써 우리 구세주의 오심도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의 역년을 따라 한해 한해를 지낸다면 우리의 신덕이 더욱 두터워지고 우리는 신앙생활에 재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멘.
宣 로벨도 神父(인천 답동본당 보좌 · 메리놀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