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4) 念願(염원) ①
발행일1962-12-02 [제353호, 4면]
이날밤 수련이는 오래간만에 미남이를 안고 누웠다. 아랫목에 미남이를 눕히고 창앞에는 수련이가 누웠다. 아무리 덥더라도 새벽 바람은 차다고 어머니가 미남이는 창바람을 피해 아랫목에 눕히라 하였다.
『미남이는 오늘은 좋겠다. 엄마허구 자니…』
어머니는 베개만 들고 마루로 나갔다.
『어머니 왜 나가슈, 같이 주무시지』 수련이가 한마디 했다.
『마루가 시원해. 미남이 감기들까봐 늘 방에서 잤지만 오늘은 네가 데리고 자니까 난 좀 시원히 자겠다.』
수련이는 마치 어머니 품에서 미남이를 뺏은듯 -불안했다.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미남이만은 바람에 재우지 않는 어머니의 용심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할머닌 아무리 더워두 난 꼭 아랫목에서 자래』
미남이는 마치 무슨 자랑같이 속삭였다.
『할머니가 이뻐하시니 미남인 좋지』
대답은 이렇게 했으나 수련이는 어딘가 허전했다. 미남이가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게 서운해진 것이다. 미남이를 정성껏 거두어주는 어머니가 고마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남이의 사랑을 어머니에게 뺏길 것 같은 질투 같은 것이 떠올랐다.
『자 엄마 팔 비구 들어누어 응!』
마치 잃었던 보배나 되찾은 듯 미남이는 수련이의 가슴에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수련이는 미남이를 얼싸주었다. 지금쯤 송도호텔에서는 할바를 모르게 된 홍창식이가 홧김에 진영이를 이렇게 끌어안고 자지나 않을까 생각하니 미남이를 안고 있는 자기가 무슨 축복이나 받는듯 개운하였다.
잠지리가 서투른 탓인지 잠은 금방 들엇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먼동이 틀 무렵니다.
『아-니 미남이가 어딜 갓을까…』
수련이는 깜짝 놀랐다. 잠들기 전까지 분명 자기 품에 안겼던 미남이가 간 곳이 없다. 수련이는 벌떡 일어났다. 마루쪽을 내다 봤다 어느틈에 나갔는지 미남이는 할머니가 자는 마루에 가서 할머니 옆에서 자고 있었다.
『온 애두 할머니가 그렇게 좋을까』
입맛이 썼다. 모든 것을 다- 바쳐가며 미남이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있는 수련이의 가슴에는 견디기 어려운 쓰라림이 밀물처럼 닥쳤다.
수련이는 가벼운 허전증을 느꼈다.
『미남아 어서 엄마한테 가 자거라』
어머니는 잠고대같이 뇌까렸다. 그러나 미남이는 잠이 깊이 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련이는 멍하니 서서 미남이의 자는 모습을 지며보다가 금시에 달려들어 미남이를 안아 일으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용기조차 없다. 생각만이 구름장같이 피어올랐다.
『저게 내 자식인데…』
수련이는 천리밖에서 바라보듯 미남이와의 거리가 아득한 것을 느꼈다. 닭이 또 한 홰 울었다. 수련이는 무슨 부끄러운 일이나 당한 듯이 가만히 자리에 돌아와 누웠다.
『엄마 그만 일어나 아침 먹어』
미남이가 흔들어 깰때는 벌써 아침때가 지난 뒤였다. 서울서 자던 버릇이 있어 내쳐 잔 것이다.
『할머닌 어디 가셨니』
『할머닌 동순네 집에 갔어』
『동순네 집에는 왜?』
『몰라 인제 곧 오실꺼야』
수련이는 벌떡 일어났다.
『미남이 너 엄마하구 자다가 할머니한테 갔지』
약간 노기를 띠운 음성이다. 그러나 미남이는 한층 더 불만스러웠다.
『엄만 뭐 잠만 자구 뭘…』
『할머니는 안주무시디』
『할머닌 언제든지 재가 잠들때까진 자지 않어』
『오라, 그래… 심심해서 할머니한테 갔구나.』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난 잠을 험하게 잔데. 자다가 어머니 걷어차면 어떻게』
『온 얘두 엄마하구 자는데 뭘 그런걸 다 걱정하니』
수련이는 겨우 자기의 잘못을 알아냈다. 자식을 위해 돈만 벌어보냈지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마음씨는 하나도 가다듬지 못한 자기가 몹시 허술함을 깨달은 것이다.
『내 다음번 와서는 네가 잠들때까지 재미나는 동화 들려줄께』
수련이는 진심으로 이런 생각에 잠겼다. 무턱대고 돈만 벌어다준다고 아이가 따를리는 없다. 역시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써 쉬지않고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미남에게 아무런 보탬도 하지못하는 할머니를 더 따르는 미남이의 태도는 수련이에게 크나큰 깨우침을 주었다.
『역시 아이들은 손수 거두고 사랑해야 하는 거야. 나는 그저 돈벌어 보내주기에만 정신을 팔고 지냈어.』
자라는 아이에게는 거두어 먹이고 알뜰히 보살펴주는 어버이의 정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어느책에선가 읽은 기억조차 되살아 났다. 지금 수련이가 미남이를 위하여 원대한 양육방침을 세우고 「빠」에까지 나아가 고달픔을 달게 겪는 정신은 그야말로 먼 훗날에 가서야 알게될 까마득한 일이다.
미남이에게 우선 대견한 것은 쌀을 사탕을 마련해 보내는 어머니의 은공보다는 그 쌀로 밥을 지어주고 그 사탕으로써 맛난 먹이를 만들어주는 할머니의 노력이다.
『그러면 나는 결국 고아원 원장밖엔 아무것도 아닐까』
수련이는 밥상에 마주앉아 있는 미남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귀엽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들이 몹시 가엾기도 했다.
『오냐 좀더 자주 찾아오리라. 동화책을 사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배워주리라』
수련이는 결심을 새로이 하였다.
『아니 인제야 아침을 먹어』
어머니가 들어오며 소리를 쳤다.
『우리 미남이 배고프겠구나』
벌써 또 미남이 걱정이다. 수련이는 자기는 언제나 마음을 잡고 들어앉아 미남이 걱정을 해볼까 헤아려 보았다. 까마득한 일이다.
「빠」 남령에 나갈때 얻어 쓴 돈과 일수 월수며 계돈까지 끝을 내고 깨끗이 일어서면 그야말로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참 오늘은 밭농사나 한번 둘러보고가 지금 한창 우거졌다』
어머니는 밥상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딸이 눈치만 보고 있다.
『엄마 우리밭 참 넓고 좋아. 나구같이 보러가요 응』
미남이가 신이 나서 거들었다. 수련이가 빗을 지고 있는 것도 이 밭 때문이요. 「빠」에까지 몸을 잠근 것도 밭 살 돈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미남이 아버지는 숫제 없는 셈치고 미남이가 대학에 가기까지 뒤를 받들어줄 생각에 어머니가 쳐져있는 안양에다가 밭을 사고 논을 사고 장차는 포도밭도 이룩하고 닭이나 토끼도 기를 작정이다.
『서울댁! 오셨구료』
동순 어머니가 얼굴 가득 반가운 미소를 띠우고 달려들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수련이도 미소로써 맞았다. 동숙네는 미남이네 밭농사 논까지를 도맡아 봐주는 터이니 말하자면 답주와 소작인의 사이다.
『밭농사가 얼마나 잘 됐는지 꼭 좀 보구가요.』
『우리 논에는 물 걱정도 없이 모를 일찍 내서 모두들 부러워 한단다.』
수련이 옆에서 어머니가 흐뭇한 소리를 했다. 수련이는 몹시 기뻤다. 건설같이 들어오던 천석군이 부자나 된 듯 으쓱했다. 땅을 가진데서만 얻을 수 있는 풍족한 기쁨이다.
『자, 그럼 한바퀴 둘러 볼까요』
수련이는 밥상을 밀어놓고 일어섰다. 저녁때까지만 돌아가면 된다. 그동안이나마 지주의 쾌감에 잠겨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저 점심은 미남이 데리고 우리집에와 자셔요 변변치 않지만…』
『지금 막 아침을 먹는걸 보시고도 벌써 또 점심이 들어가요』
『아니 조금 있으면 성당에서 종을 칠텐데… 그럼 천천히 늦은 점심으로 차릴게요.』
『참 오늘이 공일이지. 엄마 애들이 모두 성당 주일학교에 가는데 나도 갈까.』
미남이가 엄마 손목을 잡은채 어리광 피듯 흔들었다.
『엄마 가두 좋지. 할머닌 못간다구 야단만 쳐.』
『아니 내가 언제 가지 말랬니. 엄마보고 물어보고 가랬지 않아.』
『성당이 멀지.』
『멀긴 뭐가 멀어 바로 저기 보이지 않아.』
안양 거리에 우뚝 솟은 천주교회의 높은 지붕이 마주보였다.
『가고 싶거든 가도 좋아. 그대신 할머니하구 같이 갔다가 같이 와야 해』
옆에서 듣던 동순네가 깔깔 웃었다.
『뭇구리 푸닥거리 좋아 하시는 할머니가 성당엘 어떻게 나가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