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신기한 영적을 행하신데 대하여 한마디 하겠읍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교리를 베푸시며 기막히는 영적을 행하시니 허다한 백성들이 자꾸만 예수를 따라 왔읍니다.
『백성들이 예수 가까이 둘러 있어』 하는 수 없이 예수께서는 「제네사렘」 호숫가에 떠있던 시모의 배에 올라타시고 조금 백성으로부터 떨어져 앉으신 후 구름같이 모여드는 백성을 교훈하셨읍니다. 이 좋은 기회에 영적을 행해보이시려고 베드루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잡기로 그물을 쳐라』고 명하셨읍니다. 시몬은 원래 어부였으므로 어떻게 하면 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처지니 이 야릇한 분부에 어처구니가 없었읍니다.
밤에 잡히지 않았던 고기가 대낮에 잡힐리가 없읍니다. 더군다나 시몬이 말한대로 『밤새도록 수고』하여 헛탕을 쳤기 때문에 몸은 지칠대로 지쳐 꼼짝도 하기 싫은데 깊은데로 나가라 하시니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읍니다. 허나 시몬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스승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리이다.』고 순종했읍니다. 시몬의 이런 태도는 어찌보면 『잡지 못했을 때에 당할 비웃음은 스승이 당하소서. 나는 모르겠읍니다』라고 여기는 것같이도 보입니다. 어쨌든 베드루는 고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애당초 조금도 생각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시몬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고기가 끔찍히 많이 싸여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영적의 결과는 세 방면으로 나타났읍니다. 즉 물체적(物體的) 심리적 종교적 결과입니다. 『나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하여금 와서 두 배를 어떻게 많이 채웠던지 거의 빠지게』된 것이 물체적 결과이며 『시몬이 이것을 보고 예수 무릎 앞에 엎디어 이르되 나는 죄인이오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하니 대개 저와 및 그 한 가지로 있던 모든 이가 잡은바 고기 많음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 심리적 결과이며 『예수 시몬에게 가라사대 두리지 말라 이제부터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자 되리라 하시니 배를 땅으로 닿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니라』는 것이 종교적 결과입니다.
또한 이 영적의 목적은 두 가지 있으니 호교적(護敎的)인 것과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이 당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당신의 신성(神性)을 나리내 보여 주셨읍니다. 『아무 것도 못 잡은』 재수 없는 날을 일부러 택하시어 이 영적을 행하려하시니 고기잡이에 경험이 많은 시몬은 절대 고기가 잡히지 않으리라는 짐작으로 그저 『스승의 말씀』만을 따라 그물을 던졌던 바 뜻밖에 끔찍히 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어부 일생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당해 놀라고 두려워하여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경배(敬拜)하였읍니다. 땅에서 일어선 시몬을 배와 그물을 한 번 둘러보고는 즉시 그리스도를 따랐읍니다. 이것이 호교적 목적이었읍니다.
보잘 것 없는 그물로써 그만한 고기를 잡았으니 찢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교리로써 거센 풍파에 빠져가는 영혼일지라도 너는 얼마든지 넉넉히 낚을 수 있으리라고 시사(示唆)하는 것이 상징적 목적이었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몬의 배에 올라타시어 시몬에게 그물을 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 진리를 시몬과 교회에 맡기셨기 때문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시몬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배, 교회는, 이단(異端), 열교(裂敎), 사설(邪說)이 처몰려와도 까딱하지 않고 매달려도 기울지 않고, 떠들어도 눈섭하나 꼼짝하지 않습니다. 배 밖에서 박해자(迫害者)가 핍박하여 숨을 막고 목을 조르려고 애써도 아무 소용없고 도리어 애쓰던 저희 힘에 기운이 빠져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교회만이 틀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시몬이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듯이 교회는 오류(誤謬)에 빠진 영혼들을 건지려고 진리의 그물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만이 진리를 선전할 자격이 있는가하면 그가 홀로(전체적으로) 진리를 도맡아 있기 때문이요, 진리에 요구되는 영구성(永久性)과 유일성(唯一性)과 숭고성(崇高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밝히신 진리가 오늘날까지 거기에 보탬도 버림도 없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으니 영구적임을 알 수 있고, 성 바오로께서 신앙의 유산(遺産)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알 수 있읍니다.
그 진리는 시대에 구애됨이 없고, 문화의 차이와 양(洋)의 동서(東西)를 묻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니, 성 바오로께서는 「코린토」인에게 『한 말씀과 한 정신과 한 의견에 온전히 일치된다』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일성이 없다면 현재 5억이 넘는 교우(敎友)가 일치할리가 만무합니다.
또 가톨릭교리처럼 조직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며 숭고한 진리도 없읍니다. 이론상이나 실천상의 진리가 서로 잘 짜여져 있으며 우리 지혜를 납득시키고 마음을 만족시키니 인간 존재의 이유를 낱낱이 파고들어갔던 성 아오스딩 같은 이도 이 위대한 진리에 굴복되고만 것입니다.
참다운 학자치고 가톨릭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보아도 그 숭고함을 알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가지로 교회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점은 그 백성들과 시몬의 태도이니 진리를 찾는데 열심하고 찾은 진리를 따르는데 용감하여야만 모처럼 이 영적을 행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예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盧景三 神父(꼰벤뚜알·성 프란치스꼬회 대구 범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