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2) 第4代(제4대) 朝鮮敎區監牧(조선교구감목) 張主敎(장주교)
하루 24時間이 殉敎的 生活
越南서도 獄살이 했었고
발행일1963-06-30 [제381호, 3면]
「천주의 종」 장(BERNEUX) 주교(1814-1866) 불란서의 「러·망」교구 출신으로서 1837년에 신부가 되어 먼저 월남으로 떠났다. 장신부는 그의 전교생활의 첫해부터 신앙을 위하여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월남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긴 감옥살이와 많은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다행히 석방되었으나 그곳에 더 머물러 있을수가 없어서 만주의 「요동」에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10여 년의 전교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제4대 감목으로 임명되자 곧 「상해」로 떠나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56년 3월 말이었다.
이후 그가 순교하기까지 만 10년간 그는 한국 교회에서 풍부한 수확을 거두었다. 처음으로 서울에 인쇄소를 두 개나 마련한 것도 그 분의 공적이다. 주교로서 사무 다망한 생활 중에서도 그는 신부 3·4인이 맡아볼 그런 넓은 지역을 도맡아 보았다.
그는 천사적 신심에다 깊은 신학의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이었다. 놀라운 금욕생활에다 당뇻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24시간 내리 고해를 듣는적도 있었다. 이렇게 장주교는 교회를 위하여 잠시도 쉴 줄을 몰랐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다.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영세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1866년 2월 중순 한국교회가 아직도 종교의 자유를 꿈꾸고 있던 무렵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금시 한국교회는 피의 바다가 되고 미구에 그의 목자와 주요한 지도자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천주의 길의 측량치 못할 것임이여!』(로마 11·23)
장주교는 2월23일에 체포되었다. 신문을 받을 때 그는 한국에 나온 것이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사실 그것 때문에 이미 십년을 이땅에서 숨어 살았고 그러기에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에 안 돌아갈 것을 밝혔다. 감옥에서 앞물팍에 곤장 열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잘 참아 받았다.
3월8일, 장주교는 세 신부와 같이 감옥에서 나와 새남터로 향했다. 당시 군인으로서 순교장면을 아주 가까이 목격한 박 베드루는 장주교의 순교 사실을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 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포졸의 두 번째 칼날에 주교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