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성지순례)] (20) 過越祭(과월제) 지낸 곳서 共同祈求(공동기구)도 하고
발행일1963-06-30 [제381호, 3면]
「헤브레아」대학에서 떠나 예수께서 수난 전날 종도들과 「바스까」 예를 행하셨다는 집으로 갔다. 층층계를 올라가니 교실 하나보다 약간 넓은 방이 나온다. 이미 해가 저문지라 방안은 컴컴하다. 바닥은 널직널직한 돌이 소박하게 깔렸다. 이곳이 제관(祭官)이요 희생이신 주 그리스도께서 인류창조 이래 처음으로 티없이 깨끗한 무한가(無限價)의 제사(祭祀)를 천주성부께 바치신 곳이다. 뿐만아니라 교회 창설을 완수한 천주 성신이 강림하신 곳이란다.
따라서 천지(天地)간 그 어떤 거룩한 곳이 있다면 그야말로 여기가 가장 거룩한 곳일 것이다. 그러나 환경이 그래서 그런지 혹은 그때 나의 기분 탓인지 그다지 큰 감회를 느끼지 못했다.
그곳 바로 옆에 꾀 큰 성당이 있었는데 종각에서는 우리를 환영하는 종소리가 울렸고 그 성당 지하에는 조그만큼씩한 제대가 둘러있고 그 가운데는 성모님이 임종하사 누워계시는 모양의 석고상(石膏像)을 모셔두었다. 석고상의 얼굴은 검고 또 만든 솜씨도 그다지 신통치 않아서인지 내 마음을 성모님께로 끌도록 하는 힘은 없었다.
그리고 성모님은 죽으셨으되 또한 부활·승천하셨으니 성모님의 죽음이 조금도 슬픔이 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제각기 꿇어서 신공을 바친 후에 뻐스에 올랐다.
날씨도 궂은대다가 밤도 늦었으니 배정된 숙소에 이르렀을 때는 지척을 분별할 수 없도록 캄캄했다. 이렇게 늦을 바에야 당초 무엇을 그리 꾸물거렸는지 원망이 나온다. 물론 단체행동이란 개인 행동과 달라 마음먹은대로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그래도 모두가 지성인이요 교양인들이 아니냐? 이렇게 늦잡친 것은 우리만의 책임도 아니다. 인솔자 측의 결행력(決行力)의 부족에도 기인되는 것이다. 인솔자들은 왜 결행이 늦었느냐? 그것은 되도록이면 한 사람의 기분도 상하게하지 말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단체를 이끄는데 고충(苦衷)이 있는 것이요 힘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어느 단체에고 그 지도자들을 나의 입장만을 기준해서 경솔히 비난하는 것은 경박한 짓이겠다.
우리나라에서 더우기 정치한다는 사람들과 신문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서로 지지고 뽁고하는 따위는 도(度)가 지나칠 때 오히려 비난하는 측이 역겹고 타기(타棄)되어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배당된 숙소는 그곳 방지거회 수도원인데 「토일렏」에 들어가려니 맞은편 벽에 피타(被打)되어 상처입은 사람의 무서운 그림이 걸려있다. 아마 자기네들 회원 중 한 순교자인 모양이다. 가슴이 섬찟하다. 밤에 또 이곳을 방문해야 할 습관을 지닌 나로서는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안이나 다를까 새벽 3시경 기별이 왔다. 어제 저녁에 본 그림이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른다. 처음에는 망서렸으나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림일 따름. 무엇이 겁이 나느냐? 싱거운 사람!』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니 아무런 겁도 안 난다. 이것이 소위 정신력이 아니겠느냐? 정신일나 말이나니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