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代(역대) 「바오로」 敎皇(교황) 一致(일치) 위해 盡力(진력)들
波瀾困境도 많이 겪고
발행일1963-07-07 [제382호, 2면]
바오로6세라는 교황명 선택의 이유를 「옷세르바토레·로마노」의 라이몬드만치기 편집인은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에서 설명했다.
『바오로라는 교황명은 가톨릭 「프로테스탄」 「올스독스」가 다같이 공경하는 보편적 일치의 상징이다. 과거의 바오로 교황들 가운데 적어도 3위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성청의 외교관이었고 5위 전부가 이태리인이었다. 바오로2세와 바오로5세는 러시아의 「올스독스」와의 재일치를 이룩하려고 노력했고 개혁자이던 바오로4세의 특색은 속개가 선언된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교회갱신과 통한다. 1545년 「드리덴띠노」공의회를 소집한 바오로3세는 공의회 소집에 따르는 여러 문제를 충분히 체험했다. 아직도 여러 나라에서 교회를 괴롭히는 교회 대 국가 문제는 바오로1세와 바오로5세 시대에 특별히 곤란했다. 바오로3세는 당시 구라파의 양대 세력이던 프랑스와 신성 로마제국 사이에 10년간의 정전협정을 맺게했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이 현 교황명 선택의 이유일 것이다.
■ 5代 바오로 敎皇 略歷
▲바오로 1세(757-767)=롬바르드와 비산틴에게 함락된 교황영토의 수복을 위해 그는 프랑크의 페핀왕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성삼(聖三)에 관한 교리와 탈선한 비산틴황제들과 동방교회의 성상파괴자들과 대항하여 성상공경을 수호했다. 그는 시성되었다.
▲바오로 2세(1464-1471)=그는 터키군의 이태리 침범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교국의 동맹을 촉구했으나 성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키군의 침범은 없었다. 그는 「루네쌍스」 학자들의 이단적 경향을 막기 위해 순수한 그리스도교 정신에 반대하는 「로마」학사원을 철폐했다. 예술의 수호자인 그는 대학을 원호했고 교황직속 「바티깐도서편집국」을 설립하여 특히 인쇄술을 장려했다. 「올스독스」와의 재일치를 구한 외에 「바티깐」의 국법을 개정했다.
▲바오로3세(1534-1549)=「루네쌍스」 학자요 예술의 수호자인 그는 성 「베드루」대성전 건축을 미케란젤로에게 맡겼다.
그는 1493년 25세 때에 추기경이 되어 1519년까지 신품을 받지 않았다. 그는 단시간의 「꽁끄라베」(교황선거)에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536년 및 1538년에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프로테스탄」 제후들의 반대와 프랑스의 프켈시스 1세왕과 찰스 5세 황제와의 논쟁으로 성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545년에 「드리덴띠노」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다. 교황청의 개혁 「로마」에 새 건물 건축 예수회의 인가 「카푸친」 「바로나히트」 「테아틴」 등 새 수도회의 육성업적이 있었으며 노예제도를 단죄하여 신발견 아메리카 대륙의 토인들의 건리를 옹호했다. 영국의 헨리8세 왕을 파문한 것도 그였다.
그는 외교에 능숙하여 프란씨스 1세와 찰스 5세 사이의 휴전이 「드리덴띠노」 공의회 소집을 가능케했다.
▲바오로4세(1555-1559)=1513년에 레오 10세 교황의 사절로서 영국에 파견되었고 1515년에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였다. 그는 한때 주교직을 떠나 성 카제탄과 더불어 「테아틴」 수도회를 창설했다. 교회의 개혁자로서 유명한 그는 이태리에 종교재판소를 재개하여 성직자의 부패와 교황선거에 있어 성직매매를 제거했다. 그는 엄격성과 자기 가족에게 치부의 기회를 준 일 때문에 악평을 받았다.
그의 사후에 민중이 그의 동상을 파괴하여 그 동상의 머리를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티베르」강에 던졌다.
▲바오로5세(1605-1621)=스페인 주재 교황대사를 역임하고 1596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바오로2세와 같이 러시아 「올스독스」와의 재일치를 시도했고 「드리덴띠노」 공의회의 법령이 시행되도록 노력했다. 교육과 병자 구제를 위한 수도회 사업을 육성하고 카나다와 아프리카의 전교활동을 발전시켰다. 성 「베드루」 대성전의 건축이 완성된 것은 그의 재위시였다.
당시 독립국인 베니스가 성직자의 국가법정 소송면제를 거절하고 교회에 대한 세속 재산의 기증 및 매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을 때 그는 베니스의 후왕을 파문하고 그 정부에게 정무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명령이 무시당하였을 때 프랑스의 헨리 4세왕의 중재로 타협안으로 협상하여 교황세력의 기울어짐을 나타냈다.
그는 1606년 영국의 제임스1세 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소수인의 범죄를 무죄한 가톨릭에게 대속(代贖)시키지 말기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