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3) 監牧(감목) 생활 23일 한 5대 안주교
一葉片舟로 金大建 신부와 입국
聖 金曜日 사형지원. 한국어 능통으로 학대 더 받아
「한국순교자전」 등 저서는 遺勳.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
발행일1963-07-07 [제382호, 3면]
천주의 종 안(DAUELUY) 주교(1818-1866).
그는 불란서 「아미앙」교구 출신으로서 신부가 된 후 얼마 안 되어서 한국에 임명을 받고 고주교와 함께 상해로 와서 거기서 김 안드레아 신부의 저 유명한 일엽편주 「나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에 우리나라의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그 후 그는 전교신부로서 12년, 부주교로 9년, 제5대 감목으로서 22일 실로 20여 년간의 풍부한 전교의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상류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되기가 누구보다도 어려웠고 게다가 윗병과 신경통까지 얻어 늘 고통 중에 있었지만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전교 신부 중에서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이만은 개고기를 좋아했고 또 참말 한국사람처럼 한국말을 잘 했다.
남들은 삼복 더위에 전교를 중지하고 쉬는 동안 안 주교는 오히려 이때를 이용해서 혹은 번역으로써 혹은 저술로써 많은 저서를 남겨놓았다. (韓漢佛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위 등) 그러나 그의 저서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그가 십여년을 걸려서 연구하고 수집한 『한국순교자전』이다.
병인년 3월 초에 안주교는 충청도 흥주 거더리의 손회장 집에서 서울에서 온 포졸한테 잡혔다. 또한 민신부 오신부 안주교의 복사인 황누가도 그때 같이 잡혀서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서 포도청의 구륫간에 갇혔다.
안주교는 한국 말을 기막히게 잘 하므로 유창하게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자주 반박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학대를 받게 되었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므로 서울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불길하다고 해서 서울서가 아니고 충청도의 포령지방의 수영(水營)에서 사형이 집행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곧 서울을 떠나 3월30일에 고마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날이 바로 예수 수난날이었다. 사실은 수영에 거의 이르렀을 때 포졸들이 주교와 신부들을 근처 마을로 끌고 다니며 구경시키고 따라서 사형을 지연시키려 했던고로 안주교는 굳이 이것을 반대하고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 수난날에 사형 집행을 요구했던 것이다.
형장은 수영에서 약 십리 떨어진 포령지방의 강가에 있는 갈매못이었다. 순교장면을 목격한 이힐라리오의 말에 의하면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여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포졸이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水使)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兩) 4백 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락했다. 포졸은 다시 안 주교한테 와서 다시 한 번 목을 치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이와같이 안주교는 예수가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아마도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