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6) 念願(염원) ③
발행일1962-12-16 [제355호, 4면]
인상이의 농장에는 장미꽃이 한창 고왔다. 촌사람으로만 여겼더니 꽃을 가꾸고 농장을 꾸며놓은 솜씨가 어지간하다. 수련이는 인상이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 사나이가 어느틈에 이렇게까지 안목이 높아졌을가 숫제 의아했다.
『참 좋아요 꼭 서양 영화에 나오는 아담한 목장 그대루 야요』
『하…하…
바루 보셨어요. 그렇지 안아두 안양읍 영화관에서 본 그대루 꾸며 보자구 했던 것이 어디 잘 돼요 겨우 이정도죠』
『뭐 이만하면 충분해요. 정말 좋아요. 놀랬어』
『내년봄엔 꼭 마차를 하나 꾸미려구 지금 꿈이 많죠』
『오라 마차를 타고 장에 가시게…』
『그럼요 맵시좋은 마차면 시시한 찦차보다는 멋지죠』
『정말 참 좋겠어요』
『수련씨가 안양 오실때마다 태워드리죠』
『고마워요 그럼 미리 예약입니다』
수련이는 장미넝쿨로 해빛을 가린 「벤취」에 걸터앉았다. 인상이는 부리나케 뒷채로 뛰어갔다. 살림봐주는 귀먹어리 아주머니에게 점심부탁을 하려는 것이다.
『아주머니 닭잡아 맛있게 구어먹게 더운 점심 차려주세요』
『아니 누가 왔기 군청 손님이셔』
『아녜요 미남이 어머니가 놀러왔어요』
『뭐… 미남이네? 아니 애기까지 있는 생과부를 불러다가 엇저려구 내 참!』
『아주머니… 암말마시구 얼른 점심이나 차려줘요』
인상이는 아주머니의 입을 막듯이 소리를 쳣다. 귀가 어두운 탓인지 아주머니의 음성은 몹시 컸다. 수련이의 귀에도 앞으로도록 똑똑히 들렸다.
『애기까지 있는…』
『생과부…』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사실 미남이라는 아들도 있고 미남이의 아버지와는 인연이 끊긴거나 다름없다.
그것을 마치 무슨 흠이나 되는듯이 빈정거리는 소리는 차마 듣기 괴로웠다. 이것은 다못 귀먹어리 아주머니 뿐만의 소리가 아니다. 아래 웃동리 모든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수련이는 얼굴이 확끈했다.
모든 것 다 잊고 목장 풍경에 흐뭇해졌던 수련이의 아름다운 상념은 꿈에서나 깨어난듯 사라져갔다.
『공연히 왔어!』
치미러오르는 후회를 안고 수련이는 벌떡 일어섰다.
『누가 뭐 인상이가 좋아 따려온줄 아나봐 아니꼽게』
내뱉듯이 한마디 해봤으나 금시에 초라해진 자기의 그림자가 무한 애달파졌다.
『수련씨! 왜 이러나요?』
인상이가 쫓아왔다. 수련이는 암말 않고 줄다름쳤다.
『수련씨!』
인상이의 숨가쁜 소리가 뒤를 따랐다. 수련이는 대답도 않고 한숨에 언덕을 넘어섰다. 인상이는 그 이상 따라오지는 않았다. 아마 귀먹어리 아주머니의 실언이 수련이 귀에 들렸음을 짐작한 까닭이리다.
『아니 너 왜 얼굴빛이 그렇게 해쑥하냐』
수련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놀랐다.
『언덕을 넘어왔더니 숨이차서…』
수련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억지로 숨을 가라앉히려 했다.
『미남인 동순네 따라서 성당에 갔단다』
『동순네두 천주교인가요』
『그렇단다. 날더러두 작구 같이 믿자것만 어디 그렇게 쉽 사리 돼…』
『뭐 계율이 무척 엄하다며…』
『양심껏 사라가면 엄한들 대수야』
『그야 그렇지만… 나같이 결혼도 하지않고 아들을 나은 사람 받아나 주겠어요』
『아니 왜 너도 천주교 믿고싶으냐』
『그런 것도 아니지만』
수련이는 말끝을 흐렸다. 이이상 자기의 과거를 되씹기가 싫은 까닭이다. 꼭 천주교에 입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괘니 천주교에서도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욱 께름하였다. 귀먹어리 아주머니의 무지한 음성이 아직도 귓결에 들리는듯 설래는 마음을 겉잡기 어려웠다.
『내 한번 자세이 아라보랴 아마 괜찮을거야』
어머니는 수련이가 천주교라도 믿으면 저윽이 마음 든든할 것 같아서 바짝 달라들었다.
『괘니 서두르실 건 없어요』
수련이는 가볍게 한마디 던지고 곧 마루로 올라갓다. 부리나게 서울로 갈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귀먹어리 아주머니의 조심성 없는 한마디가 가슴깊이 못박혀 마음이 몹시 불안해진 까닭이다.
『내 참! 누가 인상이한테 시집단대』
내뱉을 듯이 종알거렸으나 인상이를 따라서 목장으로 갈 때는 어쩐지 행복이라는게 그곳에서 기다리는가 싶기도 했다. 더우기 아직 결혼도 하지않고 외로이 지내는 인상이가 무슨 값있는 존재같기도 했다.
(이런 아름답고 평화한 곳에 부부간 사이좋게 살면 얼마나 즐거울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다. 그러면서도 인상이와 부부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일도 없다. 이런 곳에서 즐겁게 같이 지낼 남자는 역시 미남이의 아버지 박영진(朴永進)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염치없는 생각일지 모르나 이 목장, 이 꽃밭, 이 집.
모두를 차지하고 박영진이와 같이 미남이나 기르며 보람있게 지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겼을 때 귀먹어리 아주머니의 우람찬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마치 수련이가 인상이를 유혹이나 하러간 것 같이 반격을 받게되니 수련이는 가슴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치 흙묻은 손으로 비단옷이나 만지려다가 꾸지람 당한 수녀와 같이 무안했다.
『모두가 미남이 아버지가 외국으로 떠나간 까닭이다. 무슨 사나이가 그렇게 무심한지. 편지 한장 없고…』
수련이는 마루에 앉아 눈물을 씻었다.
『수련아 무슨 일이 있었기 울고 있어, 응 인상이와 싸왔니』
어머니도 처음에는 눈치만 보다가 울기까지 하는걸 보구는 소리쳐 물었다.
『싸우긴 누가 싸워요』
『그럼 왜 울어…』
『가만 좀 내버려 두세요』 수련이는 대답대신 약간 짜증을 냈다.
『온 애두.…』
어머니는 혀를 찼다.
『수련씨?』
인상이가 달려들었다. 수련이는 못들은체 고개를 돌렸다.
『이사람아 수련이가 울고 있으니 웬일인가』
수련이의 어머니는 약간 화기를 띄고 물었다.
『글쎄 귀먹어리 아주머니가 속도 모르고 함부로 떠들었지 뭡니까』
『그 늙은이의 입이 너무 걸어서 꼭 수채구녁이래두』
어머니는 무조건 귀먹어리 아주머니를 꾸짖었다.
『수련씨? 미안합니다.』
『미안하긴… 귀먹어리가 한 말. 하나도 틀리지 않는걸요.』
『그래두 그런 실례가 어디 있겠어요』
『실례가 무슨 실롑니가. 나는 미남이의 어머니구 박영진의 아낸걸요』
『글쎄 잘못했다지 않아요…』
『너무 그러시면 되례 미안해요』
『자… 어쨌든 다시 가십시다. 귀먹어리 아주머닌 내가 소리치고 나무랬더니 봇짐싸가지고 딸네집으로 갔어요』
『그런 험구쟁인 동네에 살지 않는게 좋아 그놈의 늙은이 온종일 하는 일이 아래웃동리 흉만보구…』
어머니는 덩달아 화를냈다. 그렇지 않아도 귀먹어리가 수련이 흉을 보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차이다. 가슴에 서려두었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다.
『아니 아주머니까지 이러시면 어째요』
인상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서 입을 막느라고 필사적이다.
『자… 수련씨 수련씨를 쫓아오다가 다시 생각하니 귀먹어리 아주머니를 먼저 처치해놓고 수련씨에게 사과하는게 순서일상 싶어 좀 늦게 온것이니 어서 같이 가십시다. 장미 넝쿨 욱어진 금잔디밭에서 닭은 손수 구워먹게끔 다 마련되었으니 어서 일어스세요 네.』
『글쎄 그 늙은이 어쨌다구 날보구 그런소릴해요. 내가 뭐 인상씨를 유혹이나 하러 간 줄 아나봐!』
『글쎄 언제 수련씨가 나같은 것 거들떠 보기나 했어요. 괘니 그런소리 마시구 어서 얼어나세요.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거 없잖아요. 수다쟁이 아주머닌 내보내구 모시러왔는데 내 정성두 좀 알아주셔야죠. 자… 어서 갑시다.』
인상이는 수련이 옷자락을 잡아 뜰었다. 술집에서는 아무나 잡는 손목이었만 인상이는 차마 어려워 겨우 옷자락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