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9) 抗辯(항변) ③
발행일1963-07-07 [제382호, 4면]
하기방학이 끝나고, 신학기로 접어드니 나의 심신은 그만큼 성장했었다.
대칭기둥에 키를 잰 표가 있는데 일센치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가슴의 부프름도 내 턱앞에 불룩해졌다. 내 또래의 아이들에 비하여 너무 불룩하므로 일부러 조여서 옷을 입어 보았다. 조이니 부프름은 한층 명확한 굴곡을 나타낼 뿐이다. 여름동안에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많은 가운데에 내 얼굴은 한층 희었다.
『너는 집에만 가만이 있었나 보구나』
담임선생이 이렇게 말한다.
『산으로 들로 실컷 돌아다닌걸요!』
『넌 워낙 피부가 고와서 그런가보다…』
이때 까만 얼굴 측에서.
『국산이 아닌걸 뭐!』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돌아보니 강숙이었다.
나는 힐끗 노려보기만 하고는 교실창가에서 푸르러진 하늘빛을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자고 깨면 달라지는 푸른 하늘은 내 가슴에 생명의 영양소를 부어주는듯이 보였다. 그간 우리 집안은 비교적 안온했다. 나 없는 사이에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어떤 암투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시간 안에는 별 일이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말투는 여전히 툭명스러웠으나 그건 우리 집 안에서는 보통에 속하는 일이다. 어머니를 교회에 못 가게하는 아버지의 법률도 그대로 있었다. 아버지 몰래 새로 문답책을 사다가 몰래 읽는 어머니의 숨은 자유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일요일마다 옆집 담을 뛰어넘는 것도 이제는 하나의 모험이 아니고 하주 예사로운 일과 같이 되었다. 한 번은 담에서 뛰어내릴 적에 마침 창문을 왈칵 여는 하라버지에게 들켰다. 하라버지는 눈이 맹구래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싱긋이 웃으며 다름질로 그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담에는 철망이 둥근 모양으로 들리고 대문도 새로 생겨 굳게 닫쳐져 버렸다.
다음 주일 아침. 어떻게 집을 빠져나갈까 하고 나는 궁리를 했다.
시간은 열시 오분 전인데, 대문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가진 이외에 또 하나의 열쇠가 어디선지 본듯해서, 농설함을 비롯해서 있을만한 곳을 뒤져 보았으나 허사였다. 아버지는 대문이 바라다 보이는 사랑채 앞뜰에 나와서 옛날 노인들이 쓰던 길다란 장죽을 피우고 있었다.
술은 잘 못하는 대신에 담배에 대한 취미가 있어서, 파이프만 십여개가 되었고, 장죽은 귀한 심산(深山)의 야생한 대(竹)로 만든 것이라 하며 오는 사람마다 내보였다. 귀한 물건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장죽이 싫었다.
첫째 촌스러운 꼴이 눈에 거슬리었다. 둘째는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 걸핏하면 통통한 쇠골통 끝으로 막대기 대신 어머니를 툭툭 쥐어박았다.
『이걸로 어머니를 구박했지?… 얘이 이눔의 담뱃대…』
아버지 없을 때 그 담뱃대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발길로 차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앞뜰에 핀 봉선화 쪽으로 멀거니 시선을 견주고 있었으나 신경은 대문 쪽으로 가 있는듯도 했다. 시간은 이미 열시였다. 이때, 대문을 흔들며 찾는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는 반색을 하며 급히 대문으로 가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손님은 아버지와는 반대로 배가 불쑥 나온 뚱뚱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허리는 앞으로 구부등하니, 굽었는데, 손님은 배가 무거운지, 배가 자랑거리인지, 어깨와 고개가 뒤로 자빠질 듯하다.
눈치가, 아버지에게는 귀한 손님인듯, 대접이 깍듯하다.
배뚱뚱이는 으젓하게 턱을 쳐들고는 사랑 마루에 앉는다.
『올라오시죠?』
『아니, 곧 가야 할 테니까!』
손님은 신발을 벗지 않고 걸터앉은 채로
『쟤가 딸인가요?』
하고 턱으로 나를 가르친다.
『나순아 와서 인사드려라!』
나는 그 앞에 가서 고개를 꾸벅했다.
『이제보니 예뿐 딸이 있었군요?』
하며 뚱보 손님은 걸껄 웃는다.
뭐가 웃으운지, 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손님 앞에서도 「파이프」 상자와 함께 장죽을 자랑했다.
나중에 안 일인데, 배뚱보 손님은 큰 종이 도매상의 사장인데 아버지는 그 사람한테서 물건을 외상으로 많이 갖다놓고 있었다. 뚱보사장에게 「파이프」를 하나 선사하기 위해서 오라고 한 것이었다. 나는 열린 대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어디가니?』
아버지의 소리가 뒷덜미에서 났다.
『교회에 가요.』
일부러 분명히 대답했다.
손님 앞에서 가지 말라고 호령하지는 못하는 아버지의 약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교회?… 음, 다녀오너라!』
아버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열시 십분쯤 되었었다.
대문을 나설 때는 신이 났는데 반쯤 갔을 때, 시간도 늦었거니와 교회에 가곺은 생각이 없어졌다. 담을 넘어올 적에는 「스릴」이 있었는데, 가라는 허락을 맡고 나오니, 싱거웠다. 행길목에 있는 대책점(貸冊店)에 들어가서 일원 내고, 한 시간쯤 책을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전에 없는듯이 부드러웠다. 겸상을 해서 밥도 같이 먹고 반찬거리는 의논하고 집을 수리할 일도 어머니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
『어머니, 매일 요새 같으면 좋겠어….』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 말했다.
『요샌 기분이 좋으시다. 사논 종이값이 좀 껑충껑충 뛰어올라가는 판이거든….』
『올라라 올라라 종이값….』
나는 이렇게 소리치니 어머니가 깔깔 웃었다.
다음 주일날은 대문에 자물쇠가 채여져있지 않았다. 이날은 어머니도 옷을 입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잠깐 다녀와요!』
어머니는 일부러 잘 안들릴만큼 조그만 소리로 사랑을 향하여 말했다. 아버지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보던 신문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버지 못 들으셨을까?』
『들으셨을꺼야』
『이젠 그 법률 없앤 셈인가?』
『종이값만 오르면 그 법률쯤 없어지구 말구!』
『그럼 우리 오늘 가서는 종이값 오르라고 빕시다!』
『호호호…』
어머니는 웃었다. 나는 이날 종이값이 오르라고 두 번쯤 기구했다. 기구가 모자랐는지 그런 기구는 안 들어주는지 이튿날 종이값은 대폭락을 했다.
그런줄은 모르고, 그날 저녁 무슨 첨례가 있다해서 이른 저녁을 먹고 오빠한테 집을 보게하고 아버지 오시기 전에 우리는 교회로 갔다. (나중에 진호한테 설명을 들이니, 포교당시 치명한 복자첨례의 날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장죽을 피고 앉았던 아버지가 돌아보는데 눈이 날카로왔다. 어머니가 무심코 손에 들고 들어간 문답책이, 아버지의 눈에 띄었다.
『이 빌어먹을거야. 청승맞게 그런건 들고 저녁에 어딜 다니녀….』
소리치며 단번에 장죽 끝으로 어머니의 턱 아래 목젖을 찔렀다.
어머니는 교회에 좀 가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어느 때보다 버티었다.
『이년아, 네가 그런데 가니까 재수가 없어 종이값이 떨어져서 큰 손해를 보았다』
쌍스럽고도 사나운 욕설이 연방 튀어나왔다. 나는 오빠가 나서서 한마디 할 줄을 알았는데 그는 귀머거리 모양 자기 방에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냉담한 오빠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때 아버지의 장죽이 다시 어머니의 목젖을 향하여 찔렀다. 어머니는 피하다가 한쪽 눈을 찔리었다.
『앗!』
하며, 어머니는 웅크리며 손으로 눈을 쌌다.
『어머니, 어디 봐!』
어머니의 손자국에는 피방울이 묻어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는 흥분에,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장죽을 뺏아 정강이에 대고 반쪽을 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