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신부님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미 강당에서 교실에서 다 드렸읍니다. 여기서 또 하라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는 수 밖에 없겠읍니다. 교황께서 보여주신 겸덕을 항상 모방하여 주십사는 것을…
오늘날 종교인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겸손 없이 세속과 함께 「돈」이나 「권세」로 처세하려다간 종교도 사정없이 얻어맞습니다.
그러한 당사자가 얻어터지는게 아니라 종교가 매를 엉뚱한데서 당하는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또한 진리입니다.
현세계의 종교인중에서 가장 겸손한 분으로 알려진 요한 교황 때문에 오늘날 가톨릭이 전세계에서 새로운 사랑을 받고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그리스도교 일치의 준비를 위하여 거대한 전진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께서 등극하시기 전에는 가올릭 세계에서 가장 침삼키는 교우의 하나인 「베니스」 총대주교좌를 맡고 계셨읍니다. 그러나 성하의 계씨는 백씨께서 등극하신 후에도 이탈리 산중의 농촌에서 지게를 지고 부지런히 노동하고 있었읍니다. 「네포티슴」이 심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번 공의회에서 일어난 일은 더욱 극적이었읍니다. 「프로테스탄트」 참관인들의 알현 때 일이었읍니다. 교황께서 보통의 경우 늘 한단 높은 자리에 좌정하셔서 「짐」은 「경」들에게 말하노니 하는 식의 일인층 복수형(1人稱複數形)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것이 이때까지의 모든 알현의 예였읍니다.
그런데 요안 교황께서는 그 참관인들과 같은 자리에 앉으셨고 「나」는 이렇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일인칭단수(一人稱單數)로 겸덕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전세계 「열교」신도 3분의2를 대표하는 이 참관인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정말 그 자리에 교회일치의 문을 열기 위하여 천주 성신이 강림하심을 느꼈다고들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이는 세상이 다 우러러 볼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이는 이는 자기 본당 교우 한 사람의 마음도 지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혼의 싸움에서 큰 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악착스러운 세파를 해쳐나가기에 필요한 종교인의 무기는 역시 물같은 겸손뿐입니다. 물은 그 담는 그릇에 따라 얼마든지 그 모양은 변합니다. 물은 무엇이든지 맏아들입니다.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만 흐릅니다. 얕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는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를 쳐드는 것은 덜 익은 것입니다. 사람도 인간이 될 수록 겸손한 법이며, 덜된 친구들이 건방지게 구는 것입니다. 사제품을 받으신 것은 분명히 신적질서에서 감투를 쓰시고 벼슬을 하신 것에 틀림이 없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된 의미에서가 아님은 물론이며, 교계상으로 보아도 교황의 그것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부님들은 언제나 「일인층단수」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며, 간혹 「일인층 복수형」이 꿈틀거려도 그것을 억지로 참고 누르는 것이 의무일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에 신부님들 위에는 맨 어른 천지입니다. 나만이 어른이라는 근거는 아무데도 없읍니다. 더우기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 어떻다는 것은 신부님들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절대주의의 자재가 용납되지 않는 암류가 흐르고 있읍니다.
졈덕의 표시는 복장으로도 잘 나타납니다. 신부님들은 군인과 같이 일정한 제복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제복이 있는 이상 공중 앞에 나타날 때에는 복장을 위반할 수 없읍니다.
그것을 위반할 수 없읍니다. 그것을 위반했다가는 취체에 걸립니다. 군대에서는 헌병이 복장위반을 취체합니다만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마음이 이것을 취체합니다. 여러가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은 사제의 제복이 규정되어 있는 것은 역시 수도와 겸손의 표적으로가 아니겠읍니까? 겸덕은 인간 일생을 두고 닦아야 할 덕행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 신부님들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제승품과 아울러 인간 수양은 끝났다고 생각하시면 안되는 일이며, 여러분이 겸덕에 거슬려고 복장위반에 걸린만큼, 교회에서 멀어가는 영혼들이 있다는 점만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李海南(漢陽大學校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