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이 人事드립니다
司祭敍品을 받으며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께 영광의 오늘을 준대 대하여 흠숭을 드리오며 여러 존경하올 선배 성직자와 수도자 제위와 경애하올 은인들과 교형자매 여러분께 성탄 축하와 신년의 인사를 정성을 다하여 드리옵니다.
그간 많은 지도편달과 음양으로 도운 보람에 보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오늘날 좀 더 흡족한 모습으로 나서지 못하고 초라한 자태로 대하게 됨을 송구하게 여기며 여러분들의 돌보심과 희생적 협력을 믿고 한번 주의 밭에서 품꾼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목자로서 일해보겠읍니다.
저들 일동은 서품을 계기로 다시한번 그리스도께서 진정 요구하시는 사제의 모습에 어떻게 부응하겠으며 생활한 성신의 지도를 받는 교회의 근원적 뜻(정신)을 몸과 마음, 즉 저희들 전체의 자세로 받아 생각하고(묵상)행동하는 갈대로 저희들 안에 제이의 그리스도를 구현하다가 마지막 날 부끄럼 없이 주 대전에 나아갈까 하는 것이며 둘째로 초대 우리선배 순교복자 성직자들의 순교적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변론하며 수호하던 거룩한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셋째로 오늘의 선배성직자들과 같이 우리의 시대적 위치가 안일과 무사주의로만 흘러가는 것을 용납안한 것을 명심하고 끝으로 우리들의 자리를 지혜롭고 덕성스럽게 알아서 겸손하게 선배신부님들의 하시는 제반 구령사를 거울 삼아서 실제 사목생활의 부족한 점을 메꾸어야 하는 것을 다짐합니다.
여러분들의 거룩한 기구를 바라며 이날이 더 큰 천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빌며 이만 미비한 인사를 줄이겠읍니다.
1962년 12월 새 신부 일동 드림
■ 나 自身을 땅에 묻으련다 - 韓鍾勳
먼저 나로 하여금 오늘의 영광이 있도록 음양으로 힘을 주신 여러 은인과 벗에게 맘껏 사례와 갚음을 드리지 못해 안타깝다.
사제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 뜻조차 알아 듣지 못하던 철부지인때 나는 본당 신부님의 인도를 받으며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엄하고 무섭게만 보이던 본당신부님 앞에 신학교에 가겠다는 내 청이 『너같은게 무슨 신학교엘 가느냐』 하시는 거절아닌 거절을 당했을 때 얼마나 서럽고 무안하였는지 모른다. 그때 몇몇 어른들의 격려가 없었던들 애당초 신학교에 발들여놀 염도 못먹을 것이다.
그후로부터 지금까지 반생을 버둥대며 지내오는 동안 커다란 장애물들이 내앞을 가로막았었다. 이런 것들을 내힘 아닌 다른 힘을 통해 넘기면서 내안에 형성된 이상이 아닌 결심 즉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것이 굳어졌고 이러면서 나대로의 생활시놎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신조는 사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내세우기에도 부끄럽다. 짧지도 않은 반생을 사회와 신학교에서 묻혀있다가 비로소 큰 멍에(마두 11장 30절)를 지고 나가게 되니 먼저 돌이켜지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복사하리 왔노라』(말구 10장 45절) 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만민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자니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나 그케 드러나 두려움이 앞설 뿐이다. 목전에 내가 걸어야 할 길은 나만이 아는 나자신을 세심히 감시하면서 종으로서 상전께 할 본분을 충실히 행할 따름이다.
현실만이 항상 내 앞에서 나를 채찍질하리라 하는 각오 밑에 우선 나 자신을 지금부터 땅속에 영원히 묻어버려야 하겠다. 『나 나를 모든이의 종이되게 하였노라』(코전 9장 19절)
(서울대교구)
■ 모두 참 아머지를 알았으면 - 成珉浩
『온 세상이여 주께 용약할찌어다. 그이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기버하며 주를 섬길찌어다. 용약하며 그이의 면전으로 들어 갈찌어다.』 (성영 99)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시요 천주시며 우리의 아버지를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다가 나중에는 한곳에서 영원히 주를 모시고 살고 싶은 마음이 이런 성영을 옮게 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딱한 일이다. 아버지를 모르고 사는 것보다 더 딱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비록 육신만을 낳아준 어버이를 알고 효도한다 할지라도 영혼과 생명의 모든 기능을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모른다면 이는 너무도 불쌍한 일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할 양이면 돌이 만드시 소리하리라』라고 하신 스승의 말씀을 생각하자. 만물을 대신하여 주를 알고 섬겨야할 우리 사람이 아버지를 모르고 우리 대신들이 천주를 찬양한다면 정말 면목이 없다. 더우기 우리의 아버지를 섬기기는 커녕 항거하고 반대하는 무리가 현대에는 너무도 많다.
천주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가 구원되도록 당신 성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를 모르는 불쌍한 형제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아버지를 알게할까 하며 모든 노력과 수고를 즐겁게 바칠 것이다. 그들에게 온 세상을 얻어주는 것보다 더 귀중한 일이 아닌가. 모두가 아버지를 알고 더욱 잘 알기를 위하여 나의 귀중한 청춘과 일생을 즐겁게 바치자.
『만민이 너 하나이신 참 천주와 및 너 보내신 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것이 곧 영생이로소이다.』(요왕 17,3)
(전주교구)
■ 聖主 예수님의 設計대로 - 崔光淵
철이난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자기의 앞날에 대하여 이것 저것 생각해보고 또한 그럴듯한 설계를 해본다.
아마 이것은 이성적 동물인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우기 10대 20대의 젊은 층일수록 미래에 대한 동경과 꿈이 많고 이에 대한 설계도 가지가지이며 변화가 많다 이제 10여년간의 복음자리였던 이곳 신학교를 나서는 새 신부들에게도 여러가지의 아름다운 그리고 희망에 찬 꿈이 깃들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설계가 없다. 여러교우들이 이 글을 보고 실망하실지 모르나 숨김없이 말씀드려 나에게는 앞날에 대한 설계가 없으며 또 필요하지도 않은상 싶다. 꿈이 없으니 벌써 늙었나 하고 스스로를 진단해보기도 한다. 왜 꿈이 없을까? 구태여 이유를 대라면 꿈이 너무 많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꿈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방학을 앞두고 하는 방학설계 한번도 알뜰히 실행해 본적이 없건만 방학이 가까와오면 꼭 해야만 되는 일처럼 며칠동안은 방학꿈을 꾸기에 바쁘다. 이러한 꿈은 방학때 뿐 아니라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뀔때 새학년을 맞을 때마다 으례히 무슨 버릇처럼 되어 빠질줄을 몰랐다. 이처럼 수없이 되풀이 하다보니 얼마전부터는 다른 각도에서 생활에 대한 설계를 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제부터는 꿈의 세계에서 깨어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보자는 결심와 아울러 공중 누각격(空中樓閣)인 설계를 그만두자는 결심을 했다. 이런데 정력을 기울이는 것보다도 차라리 지금 나에게 주어진바 임무에 좀더 성실하려고 애쓰는 편이 몇배 나아 보였다. 더구나 사제의 생활에 별다른 설계가 있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 생활 자체가 확고부동한 성주 예수님의 설게로 꽉 짜여져 있는 터이니 여기에 무슨 보탬과 덞이 있겠는가.
(서울大敎區)
■ 꼬마친구들을… - 朴春植
『족보를 바꾸어야 할 때가 다가왔구나』
이렇게 신품을 앞두고 나는 생각해본다. 사제의 생활을 의곡하는 수가 흔히 있는데 새 신부들에게 대한 어떠한 기대를 가진다는 사실에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왕 「펜」을 들었으니 구태여 한마디 적어본다면-.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싶다. 인격적으로 뮈를 당하는 어린이들에게 동정이 간다면, 종교적인 교육에 있어서까지 버림받는 어린이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이제 겨우 푸른 하늘늘 바라보면서 싹을 내민 어린이의 아름다운 마음을 짓밟는 일이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린이를 위하는 길은 사람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돈보스꼬 성인이 말씀하셨는데 실은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싶다. 어떤 때는 이런 공상까지 해본 적이 있다. 수백명의 어린이라도 좋으니 나의 필지친구가 많았으면? 꼬마 친구들과 필지를 주고 받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겠는가? 하고.
여기서 똑똑하게 밝힐 수 있는 일은, 신품을 받고 첫미사를 드릴 때 한국의 모든 어린이 특히 북한에 있는 어린이들은 기억하겠다는 마음뿐인듯 하다.
끝으로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성탄과 새해의 인사를 보내면서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담뿍 받기를 빌겠다.
(대구대교구)
■ 오직 「祈求의 도움」 믿을뿐 - 鄭明祚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그사람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바치고 있으며 또한 자기의 생명을 위해서는 남의 생명까지도 빼앗는 경우가 가끔있다. 그러나 생명보다도 더 값지고 귀중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곧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도 달갑게 바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이런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다만 사랑의 가치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자연적인 사랑의 값이란 자연적인 사랑의 값에 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또한 실천하기도 힘들 것임도 명백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초자연적 사랑을 실천해야 할 직분을 받았다.
누가 만일 나에게 너 직업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나는 『나의 직업은 기구쟁이요』라고 대답해야한다.
기구쟁이란 바로 초자연적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의 힘으로서는 몇넌번 죽어도 이 사랑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전능하신 자의 「빽」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나에게 사랑 자체이신 예수의 몸과 피를 이룰 수 있는 권능을 내게 주셨고 또한 나의 말한마디로써 평생 죽음피 생활을 하던 자도 영원희 삶에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권도 내게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주님께서 나에게 초자연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끔 하시기 위해서 태어주신 것이다.
천주님께서는 왜 지극히 미소한 나에게 이런 권능을 태어주셨는가? 그것은 오직 교우들의 끊임없는 기구와 희생으로써만 이런 직분을 행할 수 있음을 천주님께서 미리 아셨고 또 나도 그것을 바라고 용감히 나섰다.
그러니 나도 전능하신 자의 「빽」만 믿고 또 여러교우들의 기구와 희생만 바라면서 네 말씀같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무엇이든지 천주님의 명령만 기다릴 것이다.
(부산교구)
■ 벼락 감투 - 金春根
아버지라 이제 나이 30도 못되고 더구나 아내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라니 영혼의 아버지이지만 하여튼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냐 한 사람의 꼬물거리는 생명체의 어버이가 된 신혼부부의 기쁨이 과소평가 될 수 없다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만인의 아버지가 되는 새 신부의 마음이랴!
사람은 받는 것 보다 주는데 행복이 있다더라. 굶주린 걸인에게 밥 한그릇을 선사한 이쁜이의 즐거움이 크다면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그것도 끝없이 생명을 주는 사제의 즐거움이랴 나라의 최고 권위자를 집에 초대한 농부의 영광이 크다면 통치자도 그 앞에선 감히 바로 못서는 조물주를 『이는 내몸이다.』한마디로 불러내리는 사제의 영광이랴 한마디로 벼락감투이다.
12년을 준비했다지만 감투의 가치에 비하면 번개불과 같으니 벼락감투가 아닐 수 없지.
벼락감투 말이 나오니 잊혀지지 않는 일이있다. 몇해전 일이다. 어느 가난한 두 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생각한 바 있어 손이 콩멍석이 되도록 일을 하여 남편을 대학까지 졸업시켜 출세를 시켰다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출세를 하고보니 제가 잘나서 다 된 것 같아 그 여자를 차버리고 살살이 양과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누가 보나 배은 막심한 놈이다. 하기야 화장도 모르고 일에 시달려 얼굴이 끄을고 시들었음은 짐작되지만 그럴수가 있나 말이다.
역시 나도 쓰기는 벼락감투를 썼으니 이 감투를 싸워준 감투주인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만들어 쓴 것이 아니니까 .
(서울대교구)
■ 生活한 信仰 길러주려 - 鄭在脘
천주님의 사업은 모두가 천주와 더불어 살고 얼마만큼 그의 뜻에 맞도록 협력하느냐에 따라서 성과가 결정된다. 새 신부의 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미 우리의 생활은 예수께서 설계해 주셨고 교회가 이를 준행케 한다. 교회는 교법(敎法)으로 모든 사제들의 생활을 일일이 규정하여 주시고 장상(長上)은 각자에게 적합한 직임을 주시니 나는 앞으로 내가 처하는 환경을 봐서 알맞게 살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쓰라면 전에 한가지 느낀 점이라도 이야기 해보겠다. 「마두 복음 5장」에는 우리에게 진복(眞福)에 이르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여기에는 가난한 자 환란받는 자 박해받는 자 진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싫어한다. 실제 우리가 보는데로는 너무 가난해도 먹고살기위해 전력을 다하다가 보니 대개의 경우 신앙생활에 위험을 느낀다.
왜냐하면 배곺은 자에게 선행이니 천당이니 해도 제대로 들릴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富)와 명예 쾌락 등을 진복이 아닌 것으로 알면서도 추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기구 할 때와 생활(행동)할 때 달라진다. 종교생활과 실사회생활을 일치 시키고 싶다. 즉 어디에서나 천주의 뜻대로 살고싶고 남에게도 요구하고 싶다. 나는 어느날 「넝마주이」하는 이가 문답책을 들고가면서 외우는 것을 보았다. 이보다 더 가난한 이는 없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등에 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롭고 즐거워 보였다. 이는 아무리 세상사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누구나를 막론하고 진복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고 또한 권리가 있음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 일이 있다.
결국 사제와 신자가 해야할 모든 것을 교회가 가르쳐 주시나 쉬우면 쉬운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우리는 극복해 나가야 하며 좀더 삶에 있어서 좀더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고 싶고 요구하고 싶다.
(대구대교구)
■ 맡겨진 義務 다할 뿐 - 金壽昌
새 신부의 설계에는 특별한 것이 있을 줄로 믿고 호기심을 갖는다면 아마 실망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사제는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설계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사제의 이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신의 대리자들을 위하여 설계해 놓으신 것을 몸과 마음과 자유와 지성과 의지를 다하여 실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새 신부, 노(老) 신부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읍니가? 사제의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사제로서의 의무를 빈틈없이 이행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할 바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실행하게 하며 만백성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도 나약한 인간성을 지녔으므로 부족한데가 있으니 교우들은 자원으로 협력하며 기구해야 할 것입니다.
(평양교구)
□ 그릇된 神父觀
새 신부가 되면서 미래의 설계를 개진하여 달라는 시보사의 청탁을 받고 제대 앞에 꿇어 생각해보았다.
지금 우리 교우들이 갖고있는 그릇된 신부관을 경고하고 싶다. 주로 도회지의 교우들의 눈에 비치는 순인간적 신부관이 속히 교정되지 않는다면 크나큰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초자연을 망각한 현대감각에 민감한 도시인의 생리가 빚어내는 불행 그것은 성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큰 불행이다.
신부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초자연의 신적 생명이 우리의 자연생명을 꿰뚫고 자연성을 초자연의 질서에로 완성시키는 것과 같이 신부란 인간성에 머물지 않고 인간성을 뚫고 더욱 높이 향상되는 것이라 믿는다. 신부를 생존의 수단을 위한 하나의 직업적 인간으로 국한시켜서 보려는 교우들은 무의식 중에 초자연의 신부를 자연의 인간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를 가장 위한다는 열심하다는 엉뚱하게도 신부의 측근자라고 자칭하는 신자 중에 이런 병든 사람들이 많음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신부를 인간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초자연의 생활에 머물 수 있도록 기구로 또 생활로 돕고 또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굳고 튼튼하게 커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설계 이전에 교우들에게 드리는 첫마디 간절한 호소이다.
(송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