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된 지면에 이같은 엄청난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이 헛수고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서리면서 아주 중요한 욧점만 적어보기로 한다.
종교사회학(宗敎社會學)에서도 개종 혹은 입교란 사실을 다루는 영역을 종교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변동이란 현실 속에서 함축된 동인(動因)을 촉구하는 학문이다. 좀더 주체적으로 여기서는 학구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가톨릭(어느정도 새로운 종교로 인식되어 있는)에로의 입교개종과 그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연결시켜 어떤 가설을 고안해 보자는 연구이다.
1784년부터 오늘날까지 해마다의 영세자 수를 보면 어떤 해는 아주 증가되고 어떤해는 격감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증감에 상응(相應)한 사회환경이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위선 위국의 선교사들의 직접 입국을 앞서 한국인 자신들이 서둘러서 천주교를 연구발견하여 실천에 옮긴 그 시대는 사회규범의 상실, 정권싸움과 부패 경제난과 생활의 불안으로 차있었다. 이런 사회환경은 1945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그것과 꽤 비슷하다. 또 통계를 들어보면 최근 이 기간에 영세입교자가 어느때보다 훨씬 많은 수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스스로 종교가치를 탐구하고 입교한 그때와 영세자가 격증한 최근(1945-현재)의 사회적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종교의식(宗敎意識)의 재연(再燃)은 사회불안 속에서 일어난다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다.
즉 정치부패 · 경제적 위기, 인륜(人倫)의 퇴폐, 한마디로 생존 경쟁에서 수고하고 땀흘려 노력해보아도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의 획득이란 불가능하게끔 변한 사회조건 속에서 인간은 은연중(隱然中)에 삶에 대한 애착이 멀어지고 기존사회에 대한 불평과 증오를 품게된다. 여기서 사회불안에 대한 여러가지 반응작용으로써 폭동, 혁명, 정감록 등의 종교광신자들의 출현, 자살 또는 되는대로 살아가자는 심리가 발동하게 된다.
이런 여러가지 반응 중 참된 종교를 찾아보겠다는 운동이 하나의 반응작용으로써 일어난다. 즉 희망이 없게된 물질가치와 생활일반에 대한 권태증을 품게되고 동시에 끊임없이 그 무엇을 찾고 있는 인간의 심오한 기능이 쓰라리게 겪은 경험에서 물질가치 추구에서 초자연적인 어떤 대상에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불안한 사회환경만이 종교의식의 재연이란 현상을 결과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비슷한 또는 그 이상의 사회불안이 어떤나라에서도 있었지만 그 사회에는 종교의식을 반영하는 운동이 없었다.
사회불안이 인생의 허무함에서 초자연가치 추구에로 지향하게 되는 분위기는 양성해주지만 이것이 개종의 전원인(全原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사회불안이란 환경을 전제로 하고 다른 부수적인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 부수적인 원인을 열거해보면 우리나라에는 기존종교란 것이- 불교나 유교- 국교화되고 종교인들이 정치에 직접 간섭할 뿐 아니라 중대한 지위에 앉아 국가를 좌우하고 정권다툼에 종교의 요구를 희생시켜버리고 심지어는 종교를 정권획득의 도구로 삼게됐다.
즉 본래의 그 종교의 가르침을 잃게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가치를 추구학는 인간의 고상한 기능을 이 퇴폐된 기존 종교가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 박해시대나 간접박해를 당한 일제시대에 없었던 완전한 신앙의 자유, 그리고 선교사들의 증가로 인한 가톨리고가 비가톨릭자간의 빈번한 접촉, 국제열강들이 신봉하는 가톨릭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인식, 마지막으로 경제난을 풀어주는 교회의 물질적 시사(施捨) 등을 들 수 있다.
이와같은 조건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어 영세입교한 오늘의 신자 가운데 옛날과 비교해서 영세자가 훨씬 많이 속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위에 열거한 원인중 소극적인 것이 경제난을 덜어 주는 자선시사(慈善施捨)와 가톨릭교회가 세계적 무대에서 가지는 사상적 힘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즉 개인의 생존경쟁이나 국가의 국제적 지위확보에 가톨릭의 힘을 빌리자는 20세기 후진국가민족들의 직능적종교관(職能的宗敎觀)을 한국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적인 기대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쉽게 교회를 떠나게 된다.
한국가톨릭의 전망에 일언한다면 먼저 영세준비를 철저히 시키고 신앙생활의 실천 여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한 직능적 역할로만 가톨릭을 해석하는 자에게는 영세를 거부해야 한다.
종교창설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속세와 속적 권력자(俗的權力者), 부자를 삼가라고 했다. 그러나 차츰 신봉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외적 단체로서 성장해 나가며 본래 창설자가 주의시킨 권력자 부자들이 그 종교단체에게 섞이게 되고 또 이들의 힘, 즉 속적 힘으로써 가급적 많은 이들을 그 단체에 흡수시키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나 이 방향이 그대로 발전해 나가면 그 종교는 속적가치 추구에 도구화 되고 본래의 종교본질은 자꾸만 삭아지며 결국 종교로서는 멸망하게 된다. 즉 썩은 것을 저리고 어둔데를 비추는 사회에 대한 종교의 적극적 능동적인 기능은 없어지게 된다.
다행히 한국이 가톨릭을 인식하게 된 것은 쓰라린 역사와 불운한 사회환경을 통해서 얻은 보람이다. 이렇게 얻은 위없는 보화 종교의식을 그냥 숫자의 외적 증가와 사회에 대해서 가지는 외적 어떤 힘에 유혹마취되어 그리스도의 본사상, 교회의 근본적 사명과 역할을 망각함으로 종교의식을 안가졌던때 보다 더 좋지못한 역효과를 빚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李甲秀(사회학 박사 대구대주교 비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