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召(성소)] (22) 빠리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 M·E·P
韓國敎會開拓者(한국교회개척자)들
지금은 大田(대전) 安東(안동) 地域(지역) 司牧(사목)
발행일1962-12-25 [제356호, 7면]
이 회는 외국선교를 위한 「좋은 친구」란 신심회에서 1653년 극동 포교에 전심한 예수회원 로오데 신부의 주창으로 시작되었고 그를 위한 대신학교가 1663년 「빠리」에서 열렸고 1664년 포교성성에서 공인되었다. 이렇게 최고의 그리고 후대에 모범을 준 최대의 선교회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구에 속한 신부들의 선교회이다. 본회는 우리 한국천주교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우리 한국천주교의 개척자요 인인이다.
1785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입교하고 귀국한 후 북경 주교께 신부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동시 이 뜻을 교황께 전해줄 것을 의탁하였다.
1828년 레오 12세께서 이뜻을 크게 감복 곧 그해 9월에 불란서에 있는 빠리외방전교회에 그 당시 조선지구의 교회사업 담당을 명령하셨다. 그때부터 우리와 인연을 맺게되 셈이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께서 조선교회는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교구를 설정 불인 소(蘇) 주교를 조선교구의 교황대리 초대감목으로 임명, 그러나 입국치 못하고 만주에서 별세하셨다.
1837년 범주교가 서울에 들어오셨다. 그당시 포교지 어디서든지 당하는 임군의 시기, 피비린내 나는 박해 등으로 순교자를 많이 내었고 그들의 피가 신자의 씨가 되었다.
순교하신 범주교와 마신부 정신부가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다. 쇄국주의의 박해시대 벌써 신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냄으로 방인사제 양성에 노력한 이들은 1882년 신교자유를 얻은 후에도 계속 방인사제 양성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출판사업에도 노력함으로 간접적으로 우리문화 향상에 공헌하였다.
이 회의 목적이 황무지에 가서 개척한 후 방인의 자치능력이 있을 때 그들에게 혼연히 사양하고 또다른 황무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많은 교구들이 분리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서울대교구를 담당하던 본회는 1942년 방인 주교들에게 교구를 이양하고 1948년 대전교구를 맡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부 회원들은 1958년 대구교구 안에 안동감목대리구를 관할하고 있다. 「빠리」 모원에 가면 그 회 박물관에 각 포교지에서 순교한 회원들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지하 성당엔 그 순교자들의 유해도 안치해두었다. 현관에는 이별의 예식때 포교지로 처녀 출발하는 선교사의 발 친구하는 큰 그림이 본관을 지배하고 있다. 아니 사실 바오로 종도의 『로마서』의 『평화를 보하고 경사의 희소식을 가져오는 자의 발이 얼마나 고운고』란 말씀 그대로 이별의 예식 가운데 부모형제 친척 동포의 발 친구를 받고 아름다운 「빠리」 아름다운 불란서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혼연히 젊은 몸을 미숙한 포교지로 운반하고 백골을 그땅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