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통신원 몬시뇰.투세크기=과거에 평신사도직을 적극적으로 경험했고 열렬히 지지했던 바오로6세 교황성하는 평신사도직을 강력히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제로 서품되기 전부터 가톨릭 청년 운동에 전투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청년 사제로서 그는 가톨릭 대학생들 사이에 탁월한 존재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티깐」의 직원으로서 또 「미라노」의 대주교로서 예술가·전문가·지성인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관심과 고무로써 이태리의 국민적 지도자의 한 분이 되었다.
폴란드 주재 교황대사관의 단기간 근무에서 돌아온 그는 1923년에 「로마」의 부주교 뽐삘리 추기경으로부터 이태리 대학생 연맹의 지도자로 임명되었었다. 당시 「파씨스트」 청년단은 비밀히 비공식으로 가톨릭 청년운동을 방해하자 그는 공개적인 분규를 회피하여 『우리가 오늘날 깃발을 펴들고 전진을 못한다면 묵묵히 일해야 한다』라고 훈시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현 서중부(西中部) 아프리카 주재 교황사절 세르지오.삐네돌리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만일 이태리에서 정부의 직원들을 포함하여 겁 없이 외부적 인생 투쟁 속으로 들어갈 가교(假橋)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FUCI(이태리 가톨릭 대학생 연맹) 시대에 양성된 결정적이며 비타협적인 양심 때문이다. 당시 몬시뇰 몬티니었던 바오로 교황은 그 사람들을 위해 독특하게 강이(强毅)한 지도자였었다』
1962년 몬티니 대주교는 봉재 교서에서 교회의 동시대 사회와의 접촉은 『평신도의 사도직에 관련되었으며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음은 평신도는 교회의 사명이 수행되어야 할 바로 그 속세 안에 생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성직자보다 속세의 경험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들은 속세에 대한 교회사명의 가장 밀접한 증거자요 그 현상들을 목도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교회 당국과 평신도의 합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합작이란 현 사회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교회에게 지시하는데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개막 전야에 몬띠서 추기경은 평신도 사도직을 공의회의 가장 중대한 사업의 하나로서 선언했었다.
『가톨릭 평신도는 이번 공의회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명예로운 승인을 받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교회에 있어 평신도의 지위는 성세성사가 드높혀 초자연적 생명을 보장하고 신앙의 공적 고백과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명하는 견진성사가 치올린 정도까지 올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공의회에서 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평신도 사도직의 두 가지 특별한 양상을 선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례적 신비에 점점 더 밀접히 참여』하도록 평신도의 영성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둘째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자기 고유의 증거로서 교회 당국과 합작』하는 평신도 성소를 발전시킴이다.
『그러나 내일에 망상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환상을 경계할 것이다. 첫째 환상은 공의회가 교회의 현질서에 있어 급진적으로 놀라운 개혁 명령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 환상은 가톨릭 생활에 있어 허다한 결함 불완전 남용의 교정방법을 창안할 것이라는 것이다. 공의회는 마술장(魔術_)이 아니다』라고 그는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