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7) 回顧(회고) ①
발행일1962-12-25 [제356호, 8면]
『미스 김! 수련씨! 내가 그런게 아니지 않아! 내맘을 알아주어요! 자 어서 같이 갑시다! 웅』
인상이는 애원하듯 수련이를 졸랐다.
『글세 난 곧 서울로 가야해요. 다음번 와서 찾아갈께 오늘은 그냥가세요』
수련이는 한사코 인상이를 떼여 보내려했다. 인상이는 눈물이 글썽 글썽 했다. 마치 꾸중들은 아이같았다. 수련이는 인상이의 눈물을 보았다. 새삼 가슴이 덜컥했다.
『이 사나이가 아직도 미련을 남겨 지니고 있구나.』
인상이가 수련이를 좋아한 것은 수련이 처녀쩍부터이다. 미남이 아버지와 만나기도 전일이다.
같은 마을에 이웃하여 자라난 두 사이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다. 안양내에 나아가 고기도 잡고 수리산에 올라서 머루 다래도 땄다. 가을만 되면 그숱한 밤나무밭을 아침마다 헤메며 아람을 주울 때도 인상이는 항상 수련이 옆에 있었다.
그러나 수련이의 집보다 인상이네 집이 가세도 넉넉하고 또 가문도 있어서 두 사이는 자라갈수록 멀어만 갔다. 본시 이 부락은 인상이네 일족이 여러대를 누려온 곳이다. 다른 성(他姓) 가진이는 발붙일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수련이가 어려서 인상이를 보고
『인상아…』
불럿다가 인상이 할머니한테-
『아니 네가 어찌 감히 댁 도련님보고 이름을 마구 부르나냐! 정말 괘씸하구나』
호령을 들은 일도 있다. 그러느라고 두 사이는 커갈수록 멀어만 갔다. 더우기 8·15 해방이 되고 6·25까지 겪고 보니 쫄가리만 남은 양반들은 터무니 없이 흩어져버리고 이제는 인상이가 숫제 수련이를 치어다보는 위치에 서고 만 것이다.
수련이가 인상이의 속을 안 것은 미남이를 갖은 때이다. 수련이가 서울에서 애기를 배가지고 안양 어머니 한테와 있게되자 인상이는 수련이를 자주 찾았다.
『수련씨! 애기 아버지가 부실하거든 애기는 내가 맡아 기를게, 뒷걱정은 아예 말구 몸이나 잘 돌봐요.』
뜻밖의 소리를 들은 수련이는 그래도 체면은 있는지라
『애기 아버지가 서울에 어엿하게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에요?』
딱잡아 떼기는 했으나 인상이가 그것을 곧이 들을리는 없다. 벌써 동순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바 있는 까닭이다.
『공연히 나를 속이지 말아요. 다 알구 있어요.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 상의해요. 힘있는대로 도와줄께』
이날밤 수련이는 주색없이 소문을 퍼뜨린 동순 어머니를 몹시 원망했으나 그것이 사실이고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수련이는 그런대로 미남이를 낳고 서울로 돌아와 미남이의 아버지 되는 박영진이를 찾았으나 그때의 박영진이는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같이 집도 알리지 않고 만날수도 없었다.
겨우 어느 다방에서 영진이를 만난적도 있긴 했으나 영진이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미안하지만 아이는 당신이 맡아 길러주어요. 난 지금 내 한몸도 가눌 수 없게 딱한처지야. 그렇다고 당신이 싫거나 아이를 내자식이 아니라는 건 아니야. 그것만은 꼭 믿어 주어요.』
『그럼. 우선은 그렇게 지낸다 하더라도 수련이는 기가 막혔다.
물론 결혼도 하지않고 몸을 허락한 것은 자기의 불찰이요 돌이길 수 없이 된 실수다. 그러나 그 책임을 자기 혼자만이 질 수는 없다.
이제는 단순히 책임만 가지고 따질 단계도 아니다. 한 사나이에게 몸을 바치고 아들까지 낳게 된 자기는 장차 어쩧게 될 것인가. 눈 앞이 캄캄했다.
속았다. 이 사나이늰 꽁무니를 빼는구나. 생각이 들자 수련이는 너무나 역겨워 벌떡 일어섰다.
『좋아요… 다 내 불찰이니까… 자식이구 뭐구 다신 말두 안할 것이니 당신 생각대로 해봐요. 오늘 이 시간부터 나는 과부가 된 셈치고 아이나 기르겠어요.』
수련이는 자리를 차고 다방에서 뛰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뒤따라 나올 줄로 기대했던 영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방 밖에서 혹시나 하고 영진이를 기다리던 수련이는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다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영진이는 그자리에 없었다. 수련이는 다방을 골고루 둘러보았다. 저쪽뒷길로 나가는 옆문이 또하나 있었다. 틀림없이 영진이는 옆문으로 나간 것이다.
『무책임한 사나이, 거짓말쟁이!』
누구나 당하는 일이지만 영진이가 자기를 쫓아다닐 때 하던 소리가 하나 하나 되살아났다.
『이제는 영진이를 다시 만날길도 아득해지고 또 만난들 무엇하랴.』
수련이는 무거운 걸음으로 안양집으로 돌아왔다.
홀로 사는 어머니. 이제는 집도 전답도 없어지고 엉성한 오막살이 초갓집에 겨우 살아가는 어머니는 수련이를 꾸짖고 욕할 기력도 없는지 그저 입맛만 다시고 수련이의 하는 꼴만 보고 있다.
『그래… 애 애비는 자식두 한번 안보러 오느냐』
어머니는 참다 못해 한마디 했다.
『회사 일로 외국에 출장을 갔어요.』
수련이는 급한대로 꾸며댔다.
『온 동리가 다 쑤근거리니… 창피해서 야단났다.』
『맘대루들 떠들래요 서울서 결혼하고 친정에 와서 애기 난게 뭐가 창피해요』
『이에 다 듣기 싫다. 결혼은 무슨 결혼야 애미두 모르는 결혼도 있어? 동리사람 청해 국수 한그릇 대접 못허구… 누가 그걸 믿어』
어머니는 한숨 지었다.
『숫제 양반이 행세허구 쌍것은 아무렇게나 살던 시절 같으면 좋았을걸… 인젠 양반 쌍놈 가리지 않고 제가끔 옳게만 살면 대접받는 세상인데… 처녀가 서울 가서 애비 없는 자식을 낳다니…』
어머니는 너무나 원통했다. 이웃이 부끄러웠다.
『제발 부탕이니 애기 애비가 누구인지 단한번이라도 데리구와… 그래야 창피를 면하지』
이것은 어머니가 입버릇 같이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영진이는 그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영진이의 유일한 친구 안명철(安明哲)이 조차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소리를 믿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어서 그후부터 수련이는 안양에 돌아갈 면목조차 없어서 그대로 서울에서 떠돌게 된 것이다.
어쨌든 수련이는 한번 잘못으로 한 평생을 그르치는 결과를 혼자 받아야 했다. (오냐 다시는 아무 생각말고 어머니와 미남이와 세식구 굶지 않고 살아갈 길이나 닦아야 한다.)
새삼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후부터 수련이는 번번히 안양에는 밤늦게 왓다가 새벽같이 돌아갔다. 이웃 사람을 대하기가 싫은 까닭이다. 그동안 인상이가 수련의 어머니를 통해 유달리 미남이를 위해 호의를 베푸는 줄은 수련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인상이의 호의가 무슨 보람이 있으랴. 어쩌다가 혼기를 놓쳤는지 인상이는 아직도 총각이고 수련이는 아들을 낳은 어머니다. 두 사람이 가까와진다면 그것은 수련이가 인상이에게 못할 노릇을 저지르는 셈이 되고 만다.
더우기 안양 뒷마을 같은 좁은 바닥에서는 차마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상이는 끈기있게 미남이를 도와준다.
『어너미두 괜히 남의 덕을 볼 생각 마시구 인상인가 그 사라 찾아오거든 다신 오지 말라고 일으세요』
『아니 그 사람이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아직 장가도 가지 않고 나이는 차서 우리 미남이를 무턱대고 이뻐하는걸… 어떻게 오지말래니?』 어머니의 대답은 모호했다.
숫제 서울에 가서 떠돌지 말고 안양에 와서 인상이와 짝지어 걱정없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수련이로서는 인상이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수련이가 술집에 나간다는 사실을 인상이가 아는 날이면 그것으로 일은 끝난 것이니 속모르고 희망을 품고 지내는 어머니가 딱할 지경이다.
지금 바로 마루 아래 애걸하듯 수련이를 조르고 서있는 인상이가 숫제 무서워졌다. 수련이가 「빠」 남령에 나가서 손님들의 술주정을 받고 있는 그 매스꺼운 꼴을 인상이가 본다면 숫제 자기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돌아설지 모른다.
『여기서 모진 맘 먹고 인상이를 아주 떼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무심코 인상이를 따라간 것이 후회도 났다.
『어쨌든 나는 곧 서울로 가야해요. 돌아가세요.』
수련이는 인상이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뜰로 내려섰다.
『아니 미남이도 안보고 가려느냐』
어머니는 못마땅한 듯이 한마디 했다.
『내려가다가 성당에서 보고가죠.』
수련이는 마치 쫓기는 사람같이 정거장으로 뚫린길로 나섰다. 어머니도 따라나섰다.
『우리 애가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어찌 생각마슈』
어머니는 멀거니 섰는 인상이를 돌아보며 넌즈시 일렀다.
수련이는 곧장 정거장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성당에 가서 미남이를 데리고 정거장으로 나오기로 한 까닭이다. 이윽고 미남이는 할머니와 또 한사람 신부(神父)의 손목을 잡고 정거장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