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22) 누가 黃錫斗
科擧(과거)길서 入敎(입교)해
當貴榮華(당귀영화) 바란 父親(부친)께 失望(실망) 안겨줘
夫人(부인)과 離別(이별) · 神父(신부) 志望(지망) 뜻은 못이뤄
死刑(사형) 길목길목서도 眞理(진리)를 說敎(설교)해
발행일1964-01-05 [제405호, 3면]
누가 黃錫斗 본 이름은 재건이며 1814년경 충청도, 연풍의 한 부유한 양반 집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과거를 보여 벼슬길에 오르게 할 복안이었다. 그런데도 재건은 과거를 보러가는 도중 주막에서 한 교우로부터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입교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권고하기 시작하였다. 외아들의 장래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던 아버지인지라 일가의 몰락을 가져올 아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아들의 말끝마다 온갖 모독과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누가는 벙어리 노릇을 하기로 결심, 그러게 근3년을 지내니 아들의 이러한 굳은 결심에 감탄한 나머지 그의 아버지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고 주교께서 한국에 오신 후 누가의 청을 들어 아내와 떨어져 살도록 허락하는 한편 그를 공부시켜 신부까지 만들 생각이었으나 교황의 관면을 얻지 못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안 주교를 도와 성서 출판에도 많이 이바지하였다.
누가는 도리에 밝을뿐더러 덕행이 뛰어난 고로 주교와 신부들이 다투어 그를 복사로 데리고 있었다.
병인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누가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안 부주교를 모시고 있었다. 주교가 잡히던날 즉 3월 14일 『너는 잡혀서는 안된다』하는 주교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주교님과 같이 가서 저도 치명하겠읍니다』고 말하며 순교를 자원하였다. 누가는 포졸들도 자기를 잡을 마음이 없음을 알자 스승인 안 주교와 생사를 같이할 굳을 결심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뒤를 몇십리나 쫓아가니 포졸들도 결국 그를 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끌려가는 도중 행로에서는 물론이오 판관들 앞에서까지도 성교 도리를 가르치기를 그리지 않으니 듣는 이 모두가 그의 강론에 탄복하여 마지 않았지만 한편 이러한 설교때문에 누가는 유달리 악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고종왕이 병중이어서 사형장을 충청도 수영으로 정하게 되자 그는 주교 신부와 같이 먼 순교의 길에 올랐다. 누가는 이번에도 도처에서 성교에 대한 설교는 그치지 않았으므로 포졸들은 누가가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혹형을 가했다. 바로 예수 수난 날인 3월 30일 고마 수영에 이르러 안주교 민신부 오신부 다음으로 장요셉과 함께 참수치명하니 때에 그의 나이 53세였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 다음으로 그의 순교는 가장 훌륭하였다』고 당시의 교우들은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