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5) 同僚(동료) 죽음보며 殉敎(순교)한 徐神父(서신부)
任地 「公州」 알기도 前에
우리말도 제법 배웠건만
발행일1963-07-21 [제384호, 3면]
「천주의 종」 서신부(BEALIEU 1840-1866).
불란서 「보르도」 교구에서 나서 「빠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에 신품을 받았다. 이어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그 다음해 민 백 김 세 신부와 같이 충청도 내포에 상륙하여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박해가 일어날 무렵에는 서신부 역시 한국말을 꽤 하게되어 고해성사도 듣곤 했다. 그래서 장주교는 공주 지방의 일부를 맡아보도록 그를 임명했던 차이었다. 그러나 곧 박해가 닥치게되니 임지에 가서 본격적인 전교를 하여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가 체포된 날은 병인년 2월28일이고 체포된 곳은 그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던 경기도 광주 근처인 듯하다. 서신부는 장주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피해볼 참으로 거처를 옮겨 한 교우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곳은 안전하였지만 서신부의 복사가 잡혀서 신부의 거처를 알려주어 직접 신부의 집까지 포졸을 인도하여 신부를 체포하게 하였다.
잡힌 다음날 그는 붉은 밧줄로 두 손이 포승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륫간에서 그의 주교를 위시하여 동료신부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신문을 받을 때 그는 왜 그가 이 땅에 온 것과 또한 천주를 위하여 죽을 굳은 결심을 몇 마디로 밝힐뿐, 그는 한국에 온지가 얼마 안되어 말을 아직 잘 못한다는 핑계로 그밖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체 대답을 피했다.
다리의 뼈와 발이 많은 매를 맞고 또 곤장의 형벌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서신부는 흩어진 몸의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기의 거룩한 희망이 실현되고 또 그의 사랑이 승리하는 행복된 기쁨 가운데 며칠을 보냈다.
3월8일 서신부는 자기의 주교를 선두로 다른 두 동료신부와 함께 한강가 새남터로 향했다. 그곳은 기해년 박해 때 범주교와 다른 두 신부가 이미 피를 흘린 순교성지였다.
장주교와 백신부의 피의 증거를 목격한 다음 셋째로 자기 자신도 포졸의 칼날에 혼연히 순교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