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1) 환경의 돌변 ①
발행일1963-07-21 [제384호, 4면]
그 후 일년이 채 못 되는 사이에 나의 가정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
오빠의 출가(出家) 어머니의 죽음….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나와 밀접한 사람이 하나 생겼다. 아버지의 담뱃대를 꺾은 사건이 있은지 얼마 안 되서, 내가 한때 담을 넘어 다니든 옆집의 노부부가 이사를 가고 새 사람이 그 집에 들었다.
국민학교 갖 들어간 어린 남매를 둔 부부인데 남편은 대학의 선생이고, 부인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이 크고 콧날이 선 이국적인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 부인을 이렇게 평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서양 사람같고, 가까이 보면 일본 사람 같애!』
내가 보기에는 우리 어머니와는 정반대로 퍽 모던한 부인이었다.
이사한지 며칠 후, 어머니와 내가 우리집 문전에서 구루마에 신고 다니는 오이장사한테서 오이를 흥정하고 있을때 그 부인이 흰 부라우스에 회색 스카트를 입고 우리집 앞을 지나갔다.
나는 두 번째 보는데 어머니는 처음이었다.
『저 아주머니가 새로 이사온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를 보다 눈이 둥그래서 그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쟁이지?』
무심코 나는 이렇게 말했는데 어머니의 얼굴에는 좀처럼 놀라움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어머니 알우?』
『아…아니…』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훨씬 뒤에 안 일인데 그 부인은 나의 생모(生母)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이 흥정을 하다 말고 멍하니 그 부인의 날씬한 뒷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다보았다.
첫 인상은 어딘지 차고 가까이 하기 어려웠는데 사귀고보니 극히 개방적이며 다정스러운 인품의 부인이었다.
그 집에는 큰 책장에 많은 책이 그득히 꽃혀 있었는데 내가 읽을만한 책도 많았다.
『나 책 좀 보겠어요…』
어느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기연이 되어 짬만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책을 읽었다. 어떤 때는 읽던 책을 마져 읽기 위해서 저녁상 숟갈 놓자마자 뛰어가서, 그 집 식구가 다 잠자리에 들어간 열두시까지 읽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한 오십권은 능히 읽었으리라. 나의 웬만한 독서의 지식은 그 집 책장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 부인은 책 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장려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과자까지 함께 대접을 받았다. 그 대신 내가 하루는 좀 더워서 무릎을 많이 내놓고 두 다리를 뻗고 책을 읽었더니.
『얘, 얘, 계집애가 그 꼴이 뭐니…』하고 야단을 맞았다.
책에 실증이 날 때는 그 집 개구장이인 동이하고 수래잡기를 하고 놀았다. 한 번은 장독 뒤에 숨은 동이를 잡다가 항아리 두껑을 와직근하고 깬 일이 있었다.
『얘 얘 이젠 술래잡기 하지마라!』
동이 엄마는 소리를 질렀으나 소리만큼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동이와 나는 그 후에도 술래잡기를 했다. 중학생이 되니 국민학교 시절이 그리웠고 철없고 걱정없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나
『나순 누나!』
동이는 나를 누나라고 했다.
『뭐?』
『나순 누나는 양키 같애?』
『너의 어머니는 양키같지 않니?』
『셈셈!』
동이는 웃었지만 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술래잡기는 예나 지금이나 같으나 어린 시절같이 재미가 덜했다.
내가 이렇게 동이네 집에서 살다시피 하니 자연 어머니도 자주 그 집에 드나들게 되었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용돈도 꾸어쓰고 꾸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와 싸웠을 때 시골 친정밖에 갈 데가 없던 어머니가 그 후로는 담 하나 사이에 있는 동이네 집으로 얼핏 피난을 갔다.
어머니가 협심증(狹心症)이란 심장병에 걸리게 된 것은 오빠의 결혼문제와 관계가 있었다. 이듬해 봄에 대학을 오빠가 졸업하자 아버지는 친구의 딸이라는 처녀의 사진을 가지고 왔다.
오빠는 재학시에 정해둔 여성이 있었고 졸업 당시에는 이미 임신 육개월이었다.
아버지는 먼저 처녀와 손을 끊으라고 하였고 오빠는 응하지 않았다. 마침 부산에 취직이 되어 오빠는 어머니한테만 얘기를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떠날 때 어머니는 오빠들의 새살림을 위하여 그때 돈으로 삼십만환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이 이환변의 고리라,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다달이 육만환이란 돈을 뽑아내야 했다.
한번은 내 교복살 돈으로 이자를 주었는데 그것이 발각이 되어 아버지의 화약고는 터졌다.
『그 돈 어따 썼어?』
돈에 대해서는 단 돈 일원도 허술히 안하는지라. 추궁이 대단했다.
『옆집 동이 엄마 꾸어주었에요. 며칠 있으면 받을꺼야요…』
『미친거….』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안 했다.
동이네 집에서는 아버지도 알게, 가끔 돈을 꾸어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말로 당장 급한 자리를 면했으나 드디어 삼십만환이란 빚을 진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콩나물값을 따져주는 아버지의 용돈으로 이잣돈을 빼내기란 처음부터 무리었다.
이자는 자꾸 밀리고 빚장이는 본전을 빼일가봐 매일같이 찾아왔다.
『쉬이, 조용히 얘기하세요. 주인이 알면 벼락이 나려요…』
어머니는 얼굴이 노래서 쥐죽은 소리를 하였다.
『당신이 갚지 못할 바에야 주인한테 얘기해야지!』
이마 복판에 팔알만한 사마귀가 붙은 빚받을 여자는 일부러 큰소리를 내었다.
『제발 내가 갚을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우』
『조금 조금 한 게 벌써 언제요?』
어머니는 두 손을 모두어 빌다시피 사마귀 여자들 보내고는 했는데, 그 여자 목소리만 나면 얼굴빛이 변했다. 그 빚쟁이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심장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가슴이 떨리고 숨이 답답하다!』
어머니는 가끔 자다가 괴로워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밭에서 돌아오더니. 누워 있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다짜고짜로 잡아끌었다.
사마귀 달린 여자가 아버지의 사무실로 찾아갔던 것이었다.
『아버지 그지마아!』
달겨들어 말리다가, 마루 바닥에 나도 떠밀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웃간에 소문은 조심해서 말은 나직했으나 표정이 무서웠다.
『자식이라고 그거 하난걸, 결혼식도 못 올려준 대신 돈 삼십만환 쥐어보낸 것이 뭐 원통해서 그래요?』
어머니도 이제는 버리고 말한다.
『그런 불효자식한테 일전 한 푼도 아깝다…』
『당신의 성미는 왜 그렇소!』
어머니로서는 드물게 보는 날카로운 목소리었다.
그 후 어머니의 병세는 일진 후퇴하면서 점점 눈이 들어가고 야위어 갔다. 하루는 세상을 떠나기 약 이주일 전인데 학교서 돌아오니 이부자리는 펴 있고, 환자의 자취는 안 보였다. 동이네 집으로 뛰어갔더니, 동이 어머니한테 무었인가 나직이 얘기를 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금방 말문이 탁 끊기었다.
『어머니 무슨 얘기 했었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할듯 하더니 입을 다물고 헝클어진 내 앞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멀거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하니 그것이 어머니의 나에 대한 작별이었다. 한동안 교회는 가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병을 생각하고 하루는 일요일 아침미사에 갔더니 영성체를 마치고 두 손을 모두고 나오는 얼굴이 까마작한 중년 여자에게 낯이 익었다. 잘 보니 어머니를 괴롭게하던 그 빚장이었다. 보기 싫은 이마의 사마귀는 미사보 속에 가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