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지오 10週年(주년)] ① 共侵(공침)의 反擊(반격)삼아
「나는 레지오를 택했다」
발행일1963-08-04 [제385호, 1면]
우리 세나뚜스 간부들은 한국 레지오 창립 1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레지오를 한국에 가져오신 현대주교님의 훌륭한 이 글을 발표하고자 한다. 이 글이야말로 10년이 된 오늘날 레지오를 보는 사제들과 신자들과 단원들에게 바른 인식과 느낌과 감동과 분발심을 일으키게하며 예리하게 폐부를 찌르는 글임을 소개한다. 레지오 사도직은 정신을 다시 명료하게 정리해주는 훌륭한 교본적인 훈화를 겸했다. 우리들은 이 글월을 가지고 한국 레지오 10주년 기념지상제전을 성대히 지내고자 한다.
성모님은 묘한 길을 통하여 1960년 12월 「마리아레지오니스」지에 자칫하면 사장될번한 이 훌륭한 글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때에 발견케 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이 시기에 꼭 우리 세나뚜스가 얻고자 하는 레지오의 효과를 충분히 거두고자 한다. 번역자는 눈깜박하지 않고 감동과 흥분 가운데 이 일을 마쳤다.
원컨대 이 글을 성모님의 뜻에 순종하여 레지오를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드리며 또는 혼돈된 레지오 정신을 다시 정리하고 늘어진 레지오 조직의 긴축의 촉진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역자는 번역에서 오는 어눌(語訥)한 감으로 인해서 독자들에게 원문의 뜻을 이해함에 있어 괴로움이 될까 염려한다.
세나뚜스 단장 이원선시오 세나뚜스 書記 이 방지거역(마리아레지오니스 1960년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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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제(司祭)」지의 1월호에서 「남미의 프로테스탄의 반전」이라는 기사에 매혹되고 말았다. 칠리의 「산찌아고」에 있는 윌리암.셍크신부는 「워싱톤」에 있는 전교회 본부 비서에게 『만일에 「프로테스탄」 선교회가 남미에서 현재의 비율로 그 노력을 대조해 보지 않고 계속한다면 「프로테스탄」은 세계의 모든 선교회에 있어서 가톨릭이 거의 1백년간에 획득한 이상의 개종자 수를 20년간에 획득할만큼 우세한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이 희귀한 열성신부는 「산찌아고」의 자기 본당 지역 내에서만 해도 과거 15년 동안에 「프로테스탄」 교회가 24개소에 세워졌다고 기사를 계속하였다. 그는 남미 「프로테스탄」의 성장을 열교선교사들의 열의와 희생정신과 평신자 직원이 훨씬 더 많다는 재정적인 뒷받침에 귀착시켰다.
라띤아메리카로 말하자면 이러한 가장 희망적인 장면과 그리고 그들의 성과가 막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기반(基盤) 지역내의 인구 확장 등을 볼 때에 과연 「프로테스탄」 확장의 새 시대에 _립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열교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희망있는 지역일 동안은 라띤·아메리카는 또한 밑바닥이 무한한 갱혈(坑穴)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기_ 많은 노력이 낭비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두자. 그렇게 되리라고 전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공산당원이든 「프로테스탄」이든 또는 가톨릭교인이든간에 어느 종류의 열심에 대해서도 나는 상당히 경의를 표시해왔다. 그리고 열성이라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거기에 비례해서 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내게는 남미의 「프로테스탄」의 성장이 한국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나 가톨릭의 성장만큼 큰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정말 한국 내의 우리 가톨릭의 성장은 막대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이루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사실상 푼전(零細한 金錢)으로 극소수의 인원으로 이 성장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다시 우리는 열심은 모든 교회 성장의 비결이라는 것과 조직을 잘하고 훈련을 잘 쌓은 평신도 없이는 결코 그 성장을 바랄 수 없다는 것과 열심을 교회성장의 수로(水路)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느 신부에게나 명백하고 너무도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직석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문제점은 누구든지 간단 없이 그것을 실지 행동으로 바꾸도록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올바른 조직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나 이러한 점들이 전연 석연하지 못하다.
한국에서 레지오·마리에는 우리가 갈망하던 사도직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 사도직에 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952년으로 돌아가서 광주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공산군의 점령 후에 교구를 그 전대로 다시 한데 뭉쳐보려고 열광적으로 노력하던 중이었으므로 진짜 선풍이 내습하려는 증조가 갑자기 그 서광을 비치기 시작하였다. -공산군의 폭풍에 대한 이 선풍은 서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영혼들의 선풍이었던 것이다. 그 해에 1천명의 개종자를 위시하여(그 전에는 7백50명이었던 것이) 조류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조류의 세력은 우리 8천 신자의 적은 단체를 압도하려고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개종하여 들어왔다. 우리는 단지 더 만은 사람들을 다룰만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자금이 없었다. 공장도 직공도 없었고 평신도도 성직자도 없었다. 다나 한 가지 예외 즉 「이중운동」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것도 각 회원이 밖에 나가서 희망 있는 개종자가 나올 때까지 영혼들을 추구하고 다니는 조직체였다- 우리의 모든 조직체들이 신심단체 또는 구호단체들이었다. 이러한 단체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단체」는 이야기와 평범한 조직적인 혼란에 끝나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너무도 말만 많고 활동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_근쓰다가 파장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성과가 즉석에서 나타나지 않을 때는 예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실망이 따르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