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世(세)의 代(대)를 覌望(관망)한다
神父들 訓練을 强調
兩敎皇의 性格差異 뚜렷
樣相이 달라질듯
요안23世 限量 없는 企劃家
발행일1963-08-04 [제385호, 2면]
【RNS 特派員 예수會員 에드워드.더프 神父 記】 바오로 6세의 새 역대를 맞이한 「로마」의 교회 및 정계(政界)는 새 교황대의 양상(樣相) 양식(樣式)을 줄잡아 보려 한다.
그 추측은 몬띠니 추기겨으로 알려진 그의 성격 기록 및 성명 등을 기초삼을 수밖에 없다. 여기 대한 일반적 여론은 이같이 돌고있다.
교황 요안23세는 완숙(完熟)한 분이다. 그의 굉장한 직관(直觀) 등은 사실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불쑥 나오는 것이었다.
바오로 교황은 실천적 계획 능력을 가진 명철한 두뇌를 가진 분이다.
바오로 교황은 아마 교회 재신(再新)의 혁명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하리라 아마 요안 교황님의 인격력(人格力)에 접(接)한데서 비롯한 본능적인 충성·현 대화를 바라는 수백만의 따뜻한 우정 및 그리스도교 상호간의 재교섭 등을 얻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편 요안 교황께서 당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만큼 구체적 계획 등을 내놓았더냐 하는데 가서는 분명치 않다.
두 분의 성격과 경력이 다른 가운데, 교회가 현대에 처(處)한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것은 참 웅장한 모습이다. 요안 성하는 한량(限量)도 없는 기획가였다. 그것을 받아 들여서 그 세부(細部)를 짓는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천주 성신 안에 완전히 신뢰(信賴)하고 있었다. 이미 알려진 바오로 성하는 어떤 행동의 과정에서 그것을 결정하기 전에 충분히 알아야 하는 피곤할 줄 모르는 전략가인 실천주의자이다.
■ 바오로 聖下를 젊은이 待接
요안 교황이 온화(溫和)하면서 그런 대담무쌍한 용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그 연령에서 온 것이었다. 새 교황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치 젊은 당년 65세이며 사상가·행정가·실천가 및 어떤 과중한 격무 중에서도 그의 훌륭한 모습을 지켜가는 건장한 활동가요 일상짜여진 생활에 빈틈없고 또 왕성한 건강의 소유자이다.
요안 교황님이 서거하시기 얼마 전 아프리카 어떤 전교주교를 접격한 적이 있다. 그에게 『답례 방문을 하기엔 나는 너무 늙었어. 기차로나 갈 수 있을까. 내 후임자는 훨씬 젊어야지 그가 비행기로 방문할 수 있을거야』고 했다.
그런 종류의 여행이 바오로 교황에게 있어서는 신기할 것 없다. 1960년 그는 「케이프」에서 「가나」와 「나이제리아」로 찝차로 수천 「마일」 전교지역을 돌아보는 아프리카 여행을 했었다. 같은해 부라질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젯트」기편으로 가서 새 수도 「부라질리아」시를 축복했다. 「리오 데 쟈네이로」 「사오 빠울르」 등을 방문하고 「노뜰·담」대학에서 아이젠하워 장군과 명예학위를 받고 계속 「시카고」 「뉴·욕」 「보스톤」 「발티모어」 및 「워싱톤」 등을 순방했었다. 요안 교황은 사건들을 만들었고 관찰해 갔었다. 바오로 교황은 조직하며 사건들을 지휘할 것이다.
■ 빈틈없는 新敎皇님
요안 교황님의 성스런 구상(構想)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양손으로 물려받은 그대로의 순수하고 단순한 계통인 교회의 체면』을 회복하는 위대한 설계(設計)를 생각한 것이었다. 정책을 설명하는 표현의 말마디같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코 비판적인 말을 쓰지 않고 쉽게 만족하며 가끔 함정에 빠지는 일조차 있었다. 바오로 교황께서는 그의 성명을 낼 때 신중히 검토한 후 그 자신이 주의 깊게 초안할 것이다.
(빠리의 「러·몽드」지 편집자 뷰버.메리씨는 교황은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 번 결정한 것은 좀체로 변경치 않을 것이다. 바오로 교황께서는 그의 모든 범절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한다. 성 베드루 대성전에서의 대관식 광경을 보도함에 있어서 「러·피가로」지는 새 교황은 「귀족적 풍모」를 보였다고 특기했었다.
몬띠니 추기경이 피선되는 당일 「미라노」와 「로마」의 주가(株價)가 떨어졌다. 이것이 몬띠니의 피선과 관계 있었는지?
혹은 실업계(실업계)가 「노동자의 주교」로 알려진 그 분에 성원을 안 보낸 탓인지 알 수 없다. 최고의 지성인이요 남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상류가정 출신의 저 빙그로스비같은 「타잎」의 신부에게 그같은 호칭(노동자의 주교)이 붙은 것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몬띠니가(家)의 3대는 사회적 「가토리시즘」 운동에 행동으로 종사해 왔다. 몬시뇰·몬띠니가 「바티깐」에 근무하던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전후 새 노동조합 운동의 정신적 기본을 주는 이태리 가톨릭 노동자협회를 창설한 일이었다.
■ 工場 다니며 미사 지내고
「미라노」의 대주교로서 소위 이태리의 「스타린그라드」로 알려진 「세스또 S.죠반니」가의 공장을 드나들면서 미사 가방을 들고 다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몬띠니 추기경은 이렇게 자신을 극복하면서 그들과 소원(疏遠)해질 수 있는 어떤 자기 품위(品位)같은 것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는 한 번 이런 말을 한 일도 있다.
『어느 공장에 들어가기보다 「루루드」 순례단을 인솔하는 편이 쉬웁다.』라고. 사실 민주응로부터 소외(疏外)당한 교황(IL PAPA DEI LIONTANI)이 없지 않았다. 몬띠니 대주교는 대교구의 통계를 만들고 그것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3백50만 영세신자와 896 본당을 가진 세계 최대의 교구 「미라노」의 영성적 상태를 긴밀히 알고 있었다. 그는 신부들에게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제발로 교회에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신부들이 노력한 일이다. 사람들이 노력하기 전에. 높이 솟은 종탑을 울리면 되리라고?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신부들이 가서 현대 생활 및 그 숨결이 서려있는 기계의 전당(殿堂) 공장의 호각소리를 들어야 한다』라고.
바오로 6세의 사회적 견해에 거기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는 이미 「빠쳄·인·떼리스」 회칙 등의 새 지평선(地平線)과 함께 그 자신이 내세우고 분석해왔다.
■ 새 世代 追求
불행히도 그러나 어쩔 수 없이(不可避) 「로마」는 사회적 의견을 이태리 정계(政界)에 국한해서 거기 대한 태도로 판단했다. 몬시뇰·몬띠니는 가톨릭대학생 연합회 지도신부였다. 그 초창기의 지도자들,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 비또리노.베르네세씨, 수차 「플로렌스」 시장을 역임한 라.삐라씨 등이 가까운 친우들이었다. 이들은 구시대의 정치를 떨어버리고 새 세대를 추궁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쟈끄.마리땡(그의 저서 「진정한 휴매니즘」 이태리의 번역판에는 몬띠니의 서문을 실었다)의 영향을 받았다.
『교회의 사명은 세속(世俗)과 성직(聖職)이 긴밀하여 후자는 오손(汚損)되지 말고 상통되어야 하겠으며 전자는 부정(不淨)되는 일이 없이 성화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그로부터 10년을 경과한 후에 내걸었다. 그는 이 원칙을 성총과 표준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냉전(冷戰)의 긴장 중 비오 12세 하에 국무차관을 지내는 그의 자리가 개인 및 정치의 논박 가운데서 「좌편」으로 지목받는 희생을 당해왔었다.
사실 몬띠니는 경제문제에 있어서의 죤.막코미크나 그리고 국제 문제에 있어서 아드라이.스티븐슨 같은 「좌편」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또 먼 것이다.
■ 범할 수 없는 品位를 지녀
몬띠니의 정신적 영토(領土)가 이태리의 문화에 한정되거나 그의 관심이 이태리인의 이익만에 관여하는 편협된 사람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했었다. 사실 지성인으로 그는 항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 취급했고 어떤 낭만적 건설을 생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교회를 세계와 그리고 모든 생활층에 가져가려 했었다. 전 프랑스 성청대사이며 프랑스 한림원 회원인 오르메손은 『신앙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사랑으로 그 영혼이 불타고 있는 신부. 이 사람은 그의 예지와 밖으로는 용의주도하고 그러면서 어떤 범할 수 없는 품위(品位)를 밖으로 보여주는 불(火)의 사람이며 그는 자신을 완전히 조절하고 있다』고 몬띠니의 풍모를 묘사했다.
이런 사제(司祭)의 사명은 현대인이 그 사회에 처한 대체적인 양상(樣相) 및 교회가 그 사명의 일부로 그 양상 속에 대처해야 하는 그러한 정확한 임무의 수행을 동반한 것이다. 세계 기구(機構)의 성장을 본 그는 교회의 이해(理解)와 참여를 강조했다. 국무성이 「유네스코」와 유엔 농업 식량기구에 「바티깐」 상임 「옵서버」를 파견한 것은 몬시뇰 몬띠니가 주선한 것이었다. 그는 각국의 교회가 만든 복지단체 즉 「가리따스」 국제단체 등을 창설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국제 가톨릭 이민(移民) 위원회의 창설을 지시했다.
■ 使徒職 重要性 미라노서 痛感
몬시뇰·몬띠니가 「미라노」 대주교로 승진발령 되었을 때 그것은 결국 「바티깐」으로부터 이동한 것이라는 정치적 견해도 떠돌았다. 그는 가령 프랑스의 노동사제(勞動司祭)를 한 시도(試圖)로써 지지했었다. 어쨌든 그는 「바티깐」으로부터 이동됨으로써 8년간의 귀중한 사목(司牧) 경험을 쌓고 종교 없는 대중을 직시(直視)할 수 있었다. 「미라노」의 대주교로서 신부들의 특별훈련사도직의 채용, 과감한 체험 등의 필요성을 알아낼 수 있었다. 1957년 그는 추기경들을 포함하는 _교가들로 대전교단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그것은 낡은 방식을 써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허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립된 사회에 불안의 씨를 심어주었다.』고 했다.
■ 共産圈과의 接觸 있을듯
바오로 6세께서 과연 공산주의자 및 「크레므린」에 의한 교황 공격에는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가, 이 또한 중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은 가톨릭 대학생 지도 신부이던 몬시뇰·몬띠니를 회상할 수 있다. 이태리 「파시스트」의 격심한 타격을 받았을 때 그는 『우리가 만일 깃발을 들고 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침묵 중에 일할 수 있다』고 갈파하였다. 한편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동구라파에서 순교자를 배출하기 보다는 소련과 협정을 맺아가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라고. 흐루시초프로부터 바오로 6세 피선 축전을 받은 것은 기대하지 않은바 아니다. 모택동(毛澤東)을 제외한 티토 동국 우두머리 울부리히트.낫셀 대통령 「요르단」의 훗세인왕 등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어 왔다.
■ 低開發地에 關心도 至大
회칙 「빠쳄인떼리스」 가운데서도 분명히 언급되었음과 같이 지금 공산세계는 경제·인간·특히 영성적인 모순에 봉착하여 그 본질을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는 「맑스」 신앙인간에 중대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바오로 교황의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단 하나의 구상이라고 하겠다. 교황 등극 직후 세 곳의 예방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병상에 있는 「우쿠라이나」의 요셉.스립피 대주교였다. 그는 「바티깐」 그리스도교 일치 추진국의 교섭으로 18년간의 「시베리아」 옥사리에서 석방되었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박해받는 신자들이 곧 자기 사목권에 들어오기를 바라며 이는 또한 그 국가민족을 위해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황은 『생활수준이 인간답지 못한』 그들 저개발국에 더욱 활발이 복음이 전해져야하며 그들에게 모든 필요한 요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 및 인간의 자세와 인간의 필요같은 것은 강조해갈 새 역대를 만들어 가려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