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6) 入國(입국) 10個月(개월)만에 가신 金神父(김신부)
所願이 殉敎였어
國語·風俗 배우다 被逮
발행일1963-08-04 [제385호, 3면]
「천주의 종」 김(DORIE) 신부(1839-1866).
그는 불란서 「뤼송」교구에 속하는 한 순박하고도 열심한 농가의 팔남매 중에서 여섯째로 태어났다.
김신부의 순교가 아니었더라면 김신부의 집안 역시 그 곳의 평범한 다른 농가들 모양 벌써 역사에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1864년 앞으로 자기와 운명을 같이할 서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김신부는 한국에 임명되자 자기 친구에게 아래와 같은 작별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 곁을 떠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천당에서 다시 만나볼 희망을 갖는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그들을 버린다. 「천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 이것이 이후 내가 좋아할 표어인 것이다…』
1865년 5월 충청도 내포에 이르자 민신부는 안부주교 밑에 남게 되고 김신부는 서신부와 같이 서울로 향했다. 장주교는 김신부가 될 수 있는한 빨리 강론과 성사 집행을 하기 위하여 말을 배우고 풍속에 익숙되도록 그를 서울에서 약 70리 떨어진 「손골」이라는 교우촌으로 보냈다. 서신부의 거처도 거기서 15리쯤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들은 매달 한번씩 만나서 서로 고해성사도 보고 또 고향이야기로 잠시나마 그들의 향수를 풀 수가 있었다.
「손골」에서 지낸 8개월간 김신부는 그곳 교우들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천성이 매우 착하고 친절하였고 그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한국에 적합한 선교사였다. 다른 신부들모양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한편 한국 풍속엔 누구보다도 빨리 또 쉽게 익숙되어서 그는 교우들과 잘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교우들이 자기를 「김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퍽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엔 「김」이라는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다. 그들이 내게도 같은 순교의 「빨마」를 줄 수 있었으면!』 이렇게 그는 늘 기원했던 것이다.
『나도 곧 치명을 할 수 있다면!』 과연 김신부는 그의 소원대로 한국에 온지 불과 10개월만에 「손골」에서 체포되어 3월8일 한강 새남터에서 장주교 백신부 서신부 다음으로 참수치명을 함으로써 자신의 순교와 아울러 그날의 새남터의 네 목자의 순교를 맺는 영광을 가진 것이다.
김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은 「뤼송」교구 신학교 교장은 『순교는 기구이다. 그것은 피의 기구이다. 어떤 기구인가? 순교자 김신부는 그의 사랑하는 한국을 위하여 기구를 드릴 것이다. 부르짖는 그의 피의 기구를 어찌 천주께서 안 들어 주실 것인가!』라고 김신부의 순교를 현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