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12) 환경의 돌변 ②
발행일1963-08-04 [제385호, 4면]
어머니는 9월17일 짙게 푸른 하늘에 추색이 깃들인 청명한 날 새벽에 다시 뜨지 못할 눈을 감았다.
죽기 전 이틀동안은 비교적 안색도 좋았고 시골 외가로 밤주으러 가자는 말까지 하였었다. 그간 아버지는 병자에 대해서 조금도 부드러워지지는 않았다.
『기운을 내, 기운을!』
눈을 모로뜨고 쏘아보며 말하는 것이 기껏한 그의 간호였다.
가까운 곳의 냇과의사와 한의(漢醫)에게 한번씩 진찰을 받게하였을 뿐 그 이상 병의 원인이 된 정신적인 상처에 대해서는 극히 무관심하다.
빚돈은 굴릴수록 커가는 눈사람같이 날이 갈수록 이자가 불어 50만환이나 되었다. 아버지는 갚을 생각을 안했다. 죽은 뒤에 그 빚을 갚았는데, 생전에 갚았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졌을 것이었다.
『장사도 안 되는판에 가외의 빚은 왜 지느냐 말야 미친거』
나는 끝마디의 미친거라는 말이 몹시 귀에 거슬렸다. 하루는 미친거라는 말이 몇번이나 나오나 헤어본 적이 있는데, 세시쯤 학교서 돌아와서 밤 열한시 아버지가 잠들기까지에 일곱번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의 병을 돋구는 역할만 하고 있었다.
『어머니보고 왜 미친거라고 자꾸 그래』
병자가 잠시 잠이 들은듯한 무렵을 타서 나는 아버지한테 항변하듯이 물었다.
『………』
『빚돈을 낸것도 오빠를 위해선데 왜 미쳤다고 그래요?』
아버지는 눈의 흰자위가 커지면서 노려보더니
『불효자식은 개만도 못하다. 그깐놈한테는 단돈 3원도 아깝다!』
『오빠는 자기의 결혼을 자기 의사대로 하겠다는게 뭐가 잘못이에요?』
『…뭐?… 너도 그따위것 해봐라 당장 쫓아낼테다. 부모가 보는 눈이 옳지 너 따위들이 뭘 아냐?』
『…나도 이담에 결혼한다면 내 자유의사로 하겠어요!』
아버지는 눈동자를 넣지 않은 석고상(石膏像)같은 멍한 얼굴이 되더니
『미치년…』
하고 발길로 내 무릎을 탁 찬다.
『…그따위 수작만 해봐라… 애비가 벌어먹이고 입힌 공도 모르구?… 학봉(오빠)이 그놈이 내가 말한 집 처녀와 결혼했으면 색시집에서 집도 한채 얻어했을거고… 나도 장사의 도움을 받았을텐데 부모 없고 친척집에서 얻어먹고 자란 계집애를 얻다니 나중에 바가지를 차도 난 모른다.』
『…서로의 사랑이 문제지 재산 그까짖거야…』
혼잣말 비슷이 내가 중얼거리자 아버지의 주먹알밤이 내 이마박을 쥐어박는다. 망치끝같이 단단한 알밤이었다. 몹시 아팠지만 참았다. 등을 보이고 있던 병자의 몸이 굼틀하였으니 귀로는 다 듣고있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가기 전 전날 저녁, 아버지는 열한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는데 동이네 집에서 그림 동화책을 빌려와서 「백설공주」를 읽어드렸다.
『어머니, 아버지는 상대하시지 마셔, 앓는 동안은 이 책을 친구로 삼으세요!』
『내일은 그 책이나 읽을까?』
병자는 소꼽같은 그림이 예쁘게 그려진 표지장정을 가냘픈 미소로 한참 바라보더니 그 책을 베개 옆에 간직한다.
이튿날 오전 두시경부터 잠자리의 병자는 갑자기 호흡이 다급해지고 손발이 차디찼다. 가쁜 목소리로 몇번이고 신부님을 부른다. 다섯시경 날이 훤히 새는 틈을 타서 집을 나와 교회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이렇게 갑자기 마지막이 올 줄은 뜻밖이란 표정이었고, 그가 싫어하는 교회이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안면이 있는 키가 후리하고 얼굴은 동안으로 생긴 본당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하니 즉시 따라와 주었다. 교회의 지식이 없는 나는 임종시에 신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종부성사였다. 여섯시 십분경에 어머니는 오십삼세의 그 생의 막을 내렸다.
교회에서 재빨리 부인네의 일단이 와서 침적한 집안의 분위기를 들먹거려 주었다. 사흘동안 아버지의 조객은 얼마되지 않았으며 교회사람들이 친척과 같이 수시로 드나들고, 향불 앞에서 연도를 드리곤 했다.
그 속에는 고인을 괴롭히던 이마에 사마귀 달린 여인도 한몫 끼어있었다. 빚받으러 올적과는 딴판으로 다른 사람 틈에 조용히 앉아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귀절은 책도 안 보고 줄줄 외운다.
고인의 영전에서 소리내어 운 것은 나뿐이었다. 오빠도 전보를 받고 부산서 그의 아내와 같이 올라왔는데 입술을 지끈 씹고, 오히려 울지 않으려고 애를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고 나는 가끔 엿보았다. 조객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빙긋이 웃는 얼굴이 몇번 눈에 뜨였다. 나도 그의 웃는 도수를 헤어보았다. 내 눈에 발견된 것만 해도 사흘동안에 일곱번인가 여덟번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것도 있으니, 십여번은 되었으리라. 그게 또 야속해서 나는 일부러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샘이 말라서 목 쉰 소리만 나왔다.
(어머니는 진짜고,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닐지도 몰라!)
아버지의 냉담하고도 태연한 태도를 보면 어쩐지 이런 생각만 자꾸 들었다.
초상이 끝나자 오빠 부부도 아버지와 화해하는 기색이 없이 가버리고 집안에 남은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아버지와 나 이렇게 둘이 뿐이었다. 병 중에도 어머니는 식모를 두지 않고 자신이 일어나서 밥을 했었다. 이제 조석을 끓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되었고 아버지는 외출할 때면 쇠를 잠구고 나갔다. 늦게 들어오는 날은 동이네 집에 가면 쇠가 맡겨져 있었다.
혼자 있는 날은 마치 도깨비집같이 쓸쓸했다. 어머니가 누워있던 건너방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입김이 어딘지 남아있었다.
『어머니!』
하고, 그 방문을 확 열어본 적도 있다.
『나순아!』
부르는 소리가 방문께에서 들린듯한 착각에 부엌에서 뛰어들어가 보기도 두 번이나 된다.
(왜, 죽음이란 것이 있을까?)
나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는 어머니와 외가 시골에 가서 밤을 줍는 꿈을 꾸다가 여니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깼다.
딴 날 같으면 공부나 하다가 밥을 지으러 나갈 것인데 문득 새벽 미사에 참예하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넋은 구박받던 이 집보다는 종부성사를 준 신부가 미사를 드리는 교회에 와 있는 듯했다. 교회에 갔다오면 아침밥이 늦겠지만 상관하지 않고 이불도 개지 않은채 집을 나섰다. 아직 미사시간이 이르고, 몇사람 와 있지 않았는데 그 몇 사람 속에 진호가 있었다. 그는 마치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같이 전에 늘 그가 앉았던 복판자리에 앉아있었다.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요?』
같이 돌아오는 길에 진호보고 물었다.
『있구 말구』
진호는 주저하지 않고 선듯 대답한다.
(무엇으로 있다는 것을 증명할까?)
이런 의문이 머리에 설래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은 있기를 바랬다. 없다면 인생이란 것은 너무도 허무한 것 같다. 남의 죽음을 멀리서 보고 듣던 바와는 달라 직접 자기 신변에 그 일을 당하고 보니 죽음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우리 어머니의 넋이 미사 때에 와 있었던 것만 같애. 그래서 나 교회에 온 거애요…』
『죽음이란 창조자에게서 얻은 삶을 다시 창조자에게 돌려보내는 거애요… 어머니는 삶의 고달픔을 떠나 주의 품에서 안식을 얻고 계시는 거야요』
천천히 걸으며 진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보니 밥할 시간이 늦었다.
『어때!』
나는 혼자 아버지한테 저항하면서 일부러 다시 걸음을 늦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