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23) 요셉 張周基(장주기)
自己(자기)집 韓國最初(한국최초)의 배론神學校(신학교)로 바쳐
「聖敎榮光(성교영광)위해 죽는다」고
북치고 洞里(동리) 다니며 미사時間(시간)도 알리고
발행일1964-01-19 [제407호, 3면]
▲요셉 張周基 본 이름은 「낙소」이고 수원에서 나서 그곳에서 병술년(1826)에 입교하였다. 친척들이 생활을 방해하므로 충청도 제천의 배론으로 이사를 하였다.
1855년 신부들이 배론에다 첫 신학교를 세우러 왔으나 아직 박해 때여서, 큰 건물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집을 신학교 건물로 내놓고 자기는 그 옆 조그만 집에서 살았다.
그는 신학교의 농사 일과 기타 모든 잔일을 보는 하편 배론의 회장으로서 그 지역의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외교인을 귀화시키는데 열중하였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례할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북을 치고 다니며, 교우들에게 미사 시간을 알렸다. 이렇게 교우의 본분을 다하고 또 회장의 직분까지 모범적으로 함으로써 신부와 교우들에게는 늘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병인년 3월 1일 신신부와 박신부가 배론학당에서 잡힐 때 장회장은 교장 신신부의 권고로 제천에 가가이 있는 노럴골로 피신하였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회장을 체포하러 제천에 있던 포졸들이 다시 배론에로 왔다. 회장이 산에서 숨어서 들으니 학당에선 신부에게 숙소를 제공한 주인공을 대라고 교우들을 묶고 때리면서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회장은 곧 산에서 내려와 『내가 서양 분들에게 숙소를 제공한 장본인이다.』하고 자수하였다.
즉시 홍포를 씌우고 들것에 태워 제천을 거쳐 서울까지 압송하였다. 감옥에 갇혀 관장으로부터 여러번 앞다리에 매를 맞으며 배교의 의협을 받았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잡혀온 안주교 민신부 오신부 황누가와 같이 충청도 수영 소재지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3월 30일 예수수난날에 주교 신부들이 순교한 다음 희광이의 칼을 받으며 『우리는 성교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죽는다』하는 마지막 말을 나믹고 참수 치명하니 때에 그의 나의 약65세였다.
그의 시체는 순교한지 사흘 후 모래로 대강 덮었던 것을 약 두달후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1882년 백주교가 찾게하여 일본으로 보냈었는데 1894년 다시 찾아와 용산 신학교에 안장하였더니 후에 민대주교에 의하여 명동대성당 지하실의 복자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