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지오 10週年(주년) ② 入敎旋風(입교선풍) 일어나
「나는 레지오를 택했다」
발행일1963-08-11 [제386호, 1면]
그해 여름 나는 일본을 방문한 기회에 믿을만한 레지오단원으로부터 그 환장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중국에 있어서 레지오의 위대한 활동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태는 각양각색의 특수한 활동이 따르는 비정상적인 레지오라고 생각했다.
한국 레지오 사업도 만일에 시작되었다면 그렇게 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문제였다. 아니 한국에서 레지오는 시험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교본을 연구해 보았다. 그 교본이 신심의 강조를 소홀히 하지 않고 사도직을 강조해 나가는 방법임을 좋게 생각하였다. 결국 나는 레지오를 해보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1953년 교구의 주요한 가톨릭 중심지인 목포에다 3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다. 남녀 각각 1개의 쁘레시디움과 1개의 혼성 쁘레시디움으로.
나는 단원들을 선정하는 데도 유명한 신자가 아니고 교본이 요구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기본적인 겸손과 관용성과 의지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잘 선정하였다.
내가 교본을 읽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 중 첫째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덕행이지 종교적인 덕행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레지오 단원들이 전원 진지하게 규측을 따르게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개인적으로 이 3개 쁘레시디움 전부의 지도신부 역할을 하였다.
레지오를 허둥거리게하는 장애물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도 나를 가장 허둥거리게 한 것은 시간엄수에 대한 장애물이었다. 여러가지 좋은 덕행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시간 엄수에 대해서는 유명한 편이 못 된다. 그러므로 이 점만 가지고도 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무섭게 눈과 우박이 몰아치는 어느날 밤 강복 후에 열리기로 예정된 레지오회합에 단원들이 아마도 출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본당 신부에게 회의를 이튿날 밤으로 연기한다는 기별을 보냈다. 강복이 끝난 후 내 방문에 녹크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여자 쁘레시디움 단원 원세시리아였다.
『주교님 저희들에게 모든 회합은 정각에 시작해야만 하며 지참이나 회의를 결할 어떠한 이유도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왔읍니다.』 그녀의 뒤에는 쁘레시디움 여단원 전원이 서 있었다.
이것은 한국 레지오의 최초의 기적이었다. 레지오로 말미암아 시간을 어기는 습성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회합은 정각에 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나 약 1년 후에 단원들 가운데 놀랄만한 변화가 생겼다.
단원들은 정말 숭고한 자기 희생의 정신을 배웠으며 성화에 있어서도 뚜렷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투사들의 「팀」처럼 유기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확장에도 열심하였다. 그러나 나는 시기상조라 생각하였다.
1956년 즉 그 2년 후에 나는 추방당할 때까지 상해 꾸리아의 지도 신부였던 골롬반회원 애드워드.맥엘로이 신부에게 이 단체들을 돌봐주도록 초청하였다.
그들의 레지오의 기술면과 정신면의 훈련을 그는 75「퍼센트」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만하면 뚜껑을 열고 레지오 단원들을 내놓아도 좋겠읍니다. 그들에게 확장을 시키십시요』
그때부터 레지오는 남한 8개 교구 전체에 퍼져갔던 것이다. 1959년 8월의 통계는 다음과 같다. 6개 꼬미씨움, 34 꾸리아 444개 쁘레시디움, 행동단원 16361 협동단원 122,396
이와같은 숫자는 레지오 자체의 위용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레지오는 이제야 한국에 있어서 평신도 사도직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기타 평신도 조직들도 그 조직 내에 레지오로 훈련받은 단원들이 끼어있으면 크게 이득을 보는 형편이다.
1952년으로 돌아가서 회상해 볼 때 광주의 골롬반회 교구는 신자수 약 1만명과 그해 성인 입교자 1천명을 헤아릴 정도에 불고하였다. 한국 내에는 그 당시 전체적으로 약 20만명의 신자수밖에 없었다. 그 해의 성인 입교자 수는 7,292명이었다. 오늘날의 숫자를 보라.
1959년 한여름의 숫자를 들어보자. 광주교구의 가톨릭 인구는 52,000명이며 그 연말보고를 보면 성인입교자 수 7,123명이다. (이 숫자는 보는 바와 같이 1952년도의 남한 전체의 성인 입교자 수와 대략 같은 숫자다) 남한에는 전체적으로 1959년의 신자수가 417,079명이었다. 그 해의 증가숫자는 62,236명이고 약 4,4000명이 성인 입교자였다.
이와같은 현저한 증가숫자 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이 발전이 기껏해야 437명의 신부님들의 지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교리의 지도의 무거운 책임은 전교회장들이 이를 해냈는데 그 숫자는 약 1천명이었다.
그러나 광주교구에서의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서 판단하건데 레지오가 오늘날 전체 입교자 활동의 약 50%를 해낸다고 말하고 싶다.
거기에다 아동교리반 지도에도 레지오는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장 없이 말해서 전체 입교자 활동의 4%를 레지오가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같은 사실로 보아 레지오가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겨우 5년 전에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에는 레지오가 그 사태(事態)(격증하는 입교자 沙汰)를 막아냈다고 본다.
레지오가 아니었더라면 이 시대적인 입교자 사태는 우리의 낡아빠진 신자들의 적은 마음 속을 뿔뿔이 흩혀 놓았을 것이며 레지오가 아니었던들 입교자의 숫자는 형편없이 줄어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