停戰(정전) 10年(년)의 板門店(판문점)을 들여다 본다
休戰線 따라 自由의 판가름
발행일1963-08-11 [제386호, 2면]
【NC通信員 골롬반會員 바드리시오 J.버크 神父 記 板門店에서】 182만의 사상자를 낸 한국 전쟁은 너무나 값비싼 것이었다. 공산측 사상자 142만, 그 중 90만이 중국인이요 52만은 북한인이었다. 남한은 41만5천의 전사자와 42만8천의 정상자를 냈다. 전쟁은 3년 1개월 2일만에 끝났다. 미군은 15만7천53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사자는 3만3천629명이었다. 약 2백억 「달라」의 전비를 쓰고.
적어도 1천3백년간 한 우리(政治的) 안에 있던 한반도는 둘로 분할되었다. 정치협정 또는 해결을 보기까지 「유엔」 군사위원회는 그 임무를 계속해간다. 그것은(休戰) 전쟁터에서 너무나 고가(高價)로 얻은 것이었다. 「유엔」 군측은 장기 휴전에 위험을 줄리 없지만 휴정협정에 조인한 저 클라크 장군의 말을 항상 기억하리라. 『분쟁은 관계 정부들이 확고한 협정에 도달할 때까지 종식되지 않을거라』고 분단된 한국은 10년을 두고 그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렇게 10년간 한반도의 불안한 평화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지난 7월27일 사상 최장기간의 휴전은 열돌을 맞이했다.
그간 공산 북쪽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여지 없이 분쇄되고 말았다. 과거 6년간 북한은 탈출해온 피난민들을 통해 알아본 바, 종교의 자유가 없음이 역연하다. 최근 넘어온 자에 의하면 평양 시가지에서 찬송가를 부른(성탄 때) 사람들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북쪽의 한국인 신부, 수녀 그리고 평양의 홍주교 등의 신변을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그들의 성무집행을 허락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공산당은 민중으로부터 종교를 앗아가는 의식적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10년 전 휴전은 성립되었으나 법적으론 아직 전시(戰時)이다. 평화 조약은 체결되지 못했다. 155 「마일」 군사휴전선을 따라 「유엔」측과 공산측이 대치하고 있다. 쌍방은 4천 「미터」 넓이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투는 없으나 일사유사시를 충분히 마련하고 있다.
「판문점」이란 이름조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려 한다. 그것은 너무나 급히 조작한 평화의 공원(公園)이었다. 이게 최장기간의 휴전인 동시에 담판 역시 극도로 오래 끈 것이었다. 「판문점」은 이제 지도(地圖)상의 한 이름에 불과하다. 허나 공산침략에 대항했던 자유세계의 병사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
그것이 한 기억, 이름만일 수 없다. 그곳은 자유세계가 매일 공산군과 접촉하고 있는 장소이다. 그들과 만나는 몇개 장소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한국 휴전협정은 첫째 군사문서(軍事文書)이면서 관계정부들이 통한(統韓)을 논의할 정치회담의 개최를 포함한다. 휴전 9개월만에 1954년 4월 「제네마」에서 조인(調印)되었었다. 그것은 공산측과 통한을 실현하려는 다른 기도(企圖)와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였다. 이 명목의 회의를 새로 소집한 적은 없다.
WAC라 불리우는 군사정전(停戰) 위원회는 10명으로 구성두었는데 쌍방에 5명씩을 임명하고 있다. 대변인격인 수석대표는 장성(將星) 또는 제독급이다. 「유엔」측은 미군측에서 임명되고 있다. 6개월씩 교체한다. 「유엔」 참전국(參戰國)에서 나온 연락장교들이 수석대표를 돕고 있다.
공산측은 4명의 인민군장교와 1명의 중공군이 정전위(停戰委)에 참석하고 있는데 수석은 항상 인민군이다. MAC의 임무를 돕는 기록보관 번역 통역 등의 비서부를 포함하는 휴전감시 및 한쪽의 요청을 받아 회담해 간다. 합동감시단도 있다. 쌍방 군사대표로 된 5개 「팀」이 있어 비무장지대 내의 제기된 휴전위반 사항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쌍방 1명씩 합동임무 장교단을 구성하여 24시간의 「유엔」측과 공산측의 접촉 사무를 보고있다. 「판문점」 방문이 허용되고 있다. 동 회담 장소를 정확히 표현하면 합동보안 지역이다. 정전이 조인(調印)된 수백 「야드」 남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일반적으로 「판문점」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회의장소 건물은 군사정전선(停戰線)상에 있는 셈인데, 그 선은 회의 「테이블」 중앙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측은 북쪽에 「유엔」측은 남쪽의 「테이블」에 착석한다. 양쪽 「테이블」 끝에는 「유엔」과 공산측의 기(旗)가 놓여있다. 쌍방합의대로 같은 크기를 쓰고 있다. 회담은 한편의 요 청으로 열린다. 그 요청은 거부될 수 없다. 수석 대표는 각 대변인이다. 다른 대표들은 발언할 수 없다.
회담을 요청한 측에서 먼저 발언하게 마련이다. 모든 진행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회담을 굉장히 길게 끌고있다.
이곳은 처음 구경하는 사람은 그 실감을 얻지 못한다. 쌍방은 반대측 문으로 입장하여 서로 인사를 교환하거나 아는척 하는 일도 없다. 구경 온 사람들의 눈으론 그들이 처음 만나는줄 안다. 실은 서로 보기만해도 잘 아는 사이들이다.
회담은 의장의 조정이나 의제마저 없이 엄격한 의례를 싸늘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다. 회담 소집측이 개회성명을 내고 이를 번역한다. 상대편이 이에 대답하고 또 번역한다.
공산측은 항상 「유엔」측의 개회성명을 무시하고 토의사항에 관게 없는 선전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그네들의 상투적인 소리는 「유엔」이 한국을 침략하고 있다는 등 끝장도 없이 『양키 물러가라』고 반복하고 있다. 미군은 한국에서 즉시 철수하라는 요구만은 집요히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정전 위반사건은 평균 48시간에 한 번씩 발생한다. 주로 공산군은 수류탄으로 기습해온다. 바로 회담장소 근방에서 미군 헌병 면전에서 미군 병사를 죽인 일도(1962년 11월26일) 있다. 10년간 공산군은 2,247건을 위반했던 것이다. 공산군은 그 중 2건만을 인정하고 있다. 공산측의 항의를 받았을 때는 「유엔」 측은 즉시 진상을 조사하고 만일 진실이 인정될 때는 공식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시정해간다. 공산측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선전에만 광분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당시 「유엔」 군사령관 크라크 장군이 휴전협정에서 서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