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7) 포졸을 기다린 신신부
初代 神學校長 歷任
이웃 4·5個 村里 司牧도
발행일1963-08-11 [제386호, 3면]
「천주의 종」 신 신부(1830-1866) POURTHIE.
불란서 「알비」교구에서 나서 25세에 신부가 되었다. 본시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나 장주교의 요청으로 보다 긴급한 한국으로 그의 임지를 바꾸게 되었다. 신신부는 박신부와 함께 그 때 「샹하이」에서 입국을 꾀하고 있던 장주교와 만나서 2개월 반의 모험적 항해 끝에 1856년 3월 말에 한국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그의 성격이 활동적 전교에 매우 적합하였고 또 자신도 그것을 퍽 원했으나 장주교의 원의가 성직자 양성임을 알게되자 그는 자기의 소원을 희생하고 충청도 제천의 「배론」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서 만 10년간을 방인 성직자 양성이란 중차대한 성업에 오로지 헌신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신학교 근방의 3·4개 교우촌도 열심히 맡아봄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우촌의 하나를 이룩했을 뿐 아니라 또한 교편 생활의 여가를 이용한 사목생활을 통하여 신학이 지식에 그쳐서는 결코 안 되고 더 나아가서 실천되고 생활되어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자연 과학을 좋아했고 그래서 여가를 이용하여 한국의 식물과 지질학 동물학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수집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자 이 모든 것은 「배론」 신학교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교회는 물론이오 한국 과학계를 위하여서도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 뿐만 아니다. 그의 10년간의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의 결정인 「한국어문전」과 「韓羅漢辭典」도 그때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병인년 3월1일, 신신부는 박신부와 같이 「배론」 신학교에서 잡혔다. 그는 이미 장주교가 체포된 사실을 며칠 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요히 포졸을 기다렸다. 그들은 바로 장주교가 순교하던 날 서울로 압송되었다. 신신부는 구륫간으로 포도청으로 의금부로 끌려다니며 여러번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3월11일 신신부는 박신부 정말구 우아릭수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신신부는 이들 중에서 첫째로 군문효수의 형을 받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듯 아무 말없이 포졸의 세쨋 칼에 순교의 화관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