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확실히 「노이로제」의 시대이다. 인간적으로 해결키 어렵다고 생각하는 여러가지의 모순에서 빚어내는 그 어려움에서 자살 모험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을 폭발시키지 않으려고 각종 진정제와 정신요법을 필요로 하는 현대의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라 생명의 애착을 몹시 가지고 어떤 갈등과 우울 상태에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자살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축적된 고뇌의 부담을 해결코자 하는 길이 자살로 통한다.
나환자 시인이던 한하운씨가 평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라 했고, 일본의 같은 나환자 시인 아가이시 우미비도는 목울대에 칼로 손수 구멍을 내고 단 몇분만이라도 자기가 탐구하려던 그 진리를 위하여 못쓰게된 코 대신에 울대로 숨을 쉬게 하리라 하여 비장한 자학을 가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 폭력 불안과 실의(失意) 등으로 자아(自我) 파멸로 이끄는 낙담의 자살을 선택하였는가 말이다. 죽고싶어 죽는 사람 없지만 절박한 소인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밑에 마치 죽음만이 그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 같이 생각한다. 가정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 그밖에 많은 인자(因子)를 갖고 있지만 결코 문제 해결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과연 자살하려는 자가 죽은 다음에 천당 지옥을 생각하고 하는 것일까.
정신 분석학자의 말을 빌리면 자살자는 거의 전부가 우울증 환자 또는 그러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하지만 이것이 확증된 근거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우울증에서 먼저 구제해야 하리라. 작년에 있은 일이다. 저녁 9시쯤 되었을가 하얗게 소복 단장한 어느 젊은 여자가 나를 만나겠다고 찾아왔다. 다짜고짜로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연은 길었지만 욧점은 하나였었는데 추측과 맞아 자살후보자임엔 틀림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신부님께 사죄함을 받고 가겠다 하지 않는가. 알아 본 즉 가톨릭교회에서 신자가 받는 고해성사를 받고 깨끗한 양심으로 죽겠다는 말이다.
그 여자는 물론 윤락여성이었다. 이 이상 죄악 세상에 살기 싫다는 한탄이 나왔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자살을 엄금하고 있지만 더군다나 신자가 아닌 그녀가 과거를 씻는 자기의 죄과를 신부앞에 털어놓고 가련다는 심정은 좋았으나 어처구니 없는 그 요청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자 공교롭게도 천정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더니 형광등이 꺼져 버렸다.
『에구머니 어쩌나』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도 놀랐지만 나보다 더욱 놀라는 꼴이 우스웠다. 이왕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그가 무서울 것 있는가 싶었지만 역시 살고 싶은 욕망은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자살후보자가 바람이 몹시 부는 겨울날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던 길을 되돌아 섰는데 그 이유는 감기 들겠구나 하고 「마후라」 가지러 집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음에, 시간이 없어야 자살을 하지 않을가 싶다.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붙잡고 이야기라도 시키면 우선 한고비 긴박한 사태가 지나지 않을가, 감추어 두었던 할 말 못 할 말 할 것 없이 자신의 비밀을 자신이 토로하고서는 나의 일장 설교를 들을 차례가 온 것이다. 결과는 급변하여 다시 굳세게 살겠노라 하며 갔다. 전에 한강인도교 입구에 『잠간만 참으세요』라는 글귀가 걸렸다 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 자신에 관한 사정을 들어줄 시간과 상대자가 있다면 그의 결단을 힘은 드나 실패시키지 않을가 싶다. 방법은 편지로나 전화 아니면 직접 누가 출두하여 이야기를 시키고 듣고 하는 사이에 우선 그를 붙들어 놓는다. 더러는 나에게도 자살 후보자의 유서가 날라 오는데, 대개의 경우 하고 싶ㅍ었던 마지막 말이 쓰여있다. 결국 순간적인 죽음을 죽지못한 자가 살게된다. 죽으려고 하는 자의 코를 바늘로 꼭 찔러 주면 아파 죽겠노라 고함지를 것이다. 자살 후보자의 연령층은 인생이 그래도 가장 원숙한 시기에 접어드는 20대에서 40대까지가 가장 많고 그 이유야 각가지겠지만 일반적으로 남자는 실직, 병고 끝에 오는 장래 희망의 절망같은 경우가 많으며 여자는 가정불화와 실연 등 감상적 여건이 많다. 일본 동경의 자살자 통게(1961년도)는 미수자와 합치면 약3만명 정도라는데 문화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증가된다 한다. 참된 의미로 절망은 단지 물질 빈곤에서 오는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문화수준이 높은 스웨덴 같은 나라가 가장 높은 자살율이라 하니 생각하여 볼만 하다. 어디에 의지할 믿음이 없고, 신뢰를 갖지 못하고 우울증에 사로잡히기 전에 적어도 무엇을 믿고 산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인생을 인생답게 그들의 생활을 보증하여 준다. 심중에 있는 격분이나 비애를 같이 서로 나누고 돌아온다면 그 마음 가짐이 훨씬 달라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대화를 한다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짓이 아니리라.
이것이 우리의 성자 고해이다. 거기 누가 말하는지 상대를 모르면서 여기서 듣고 비로소 그를 알게된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주제는 죄다. 죄를 고하는 자가 피고요 판사다. 그 죄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절대요소이다. 사람은 일단 범한 죄를 숨겨 두는 버릇이 누구나 있지만 그 자신이 그를 모든 불안에서 구출해 낸다. 이렇게 해서 평화의 판결로 모든 내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토스토에브스키 작 「죄와 벌」 가운데서 살인자 라스코리니코프는 우리의 심리적 동태를 잘 답변하여 주고 있다.
웃음을 앗은 그에게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은 것은 창부 소니아에게 살인햇음을 고했을 때였다. 소니아는 고해 지도신부는 아니었다. 라스코리니코프는 고해성사 보는 그런 심정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그에게 심리 변화를 준 사실의 열쇠는 무엇일가? 번뇌 의식과 죄 의식은 누구가 뒤집어 싀우지는 않는다. 육신 환자에게는 누가 필요하며, 영신환자에게는 누가 필요한가. 똑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하나는 의사요 하나는 사제라는 존재다. 그렇게 필요로 하는 존재지만 죽은 다음에는 소용 없다. 모두 죽기 전이다. 사형 죄수에게 마지막으로 죄를 듣는 그런 사제의 존재가 아니라 나서 죽는날까지 범죄와 실망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제는 고해소에 앉는다. 여기에 들어오기 전과 드어와서 나갈 때까지가 문제다. 이 문제는 그 사람을 바꿔놓는 것이다. 어머니는 젖만 가지고 자녀들을 기르지 아니하고, 스승은 책과 분필만 가지고 교육치 아니하고, 사제는 설교와 미사만으로 그들의 영혼을 강장케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육신보다 영신을 일깨워 비운을 극복할 수 있는 확고한 삶의 신념을 박아 주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인생의 허무감을 인생의 존귀한 의의로 대치시켜 주어 사는 것이 천주의 은혜이며, 수욕(受辱)도 고난을 통한 감사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왜 죽으려 할까?
인간의 위와 아래 그리고 겉과 속을 들여다 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은 위의 귀중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직분이다. 독자들과 함께 신부님들이 겪는 일상생활에서 느낀 것을 수시로 우리가 들을 수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편집자)
鄭淳在(大邱 계산동 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