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에 期待(기대) - 平信徒使徒職(평신도사도직)
敎會(교회)는 信者團體(신자단체)
聖職者(성직자)의 專賣品(전매품) 아닐터
발행일1964-02-02 [제409호, 1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따라서 교회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층계」(히에라르키아)인 동시에,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모임」(에크레시아)인 것이며, 그러기에 교리문답 75조목에도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단체」라고 규정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신자의 모임」이란 주장을 하는 목적이 「권일신」(權日身)적인 오류를 범하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천주교회는 한 사람의 신자 없이 『말씀이 사람이 되사 우리 사이에 거처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종도로 조차 내려오는』 치료권에 의하여 통치되늰 예수 친히 세우신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천주교 신자단체」라는 대전제가 앞서는 이유는, 전인류에 대한 그리스도 구속사업의 계속이란 그 「밋숀」 때문인 것이다.
사실 지구의 양극까지 세상 마칠때까지 이 교회 안에서 「당신 구속 사업」을 계속한다는 목적 이외에 교직제도의 존재 이유도 교회 자체의 존재이유도 또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구속 공로를 받게코저 하신 일을 「사제」의 전매특허사업으로만은 할 수가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므로 평신도 없으면 사제도 없는 것이며, 한 사람의 복사조차 없으면 신부는 「미사」도 못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평시도사도직이란 근본 원리는 바로 이 구속사업의 계속이란 교회의 「밋숀」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에 평신도사도직이란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고 나선지도 어언간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레지오 마리에」나 JOC 같이 꾸준한 발전을 계속해온 단체도 있으나 그밖에는 대개 「사도직」의 수행이 없는 모임을 위한 모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리고 보다 더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이상의 여러 단체들도 사실상 너무나 억울한 박해 아니면 냉대 무관심 때문에 영양부족과 발육부전에 걸려있는 것이 오늘의 형편이다. 이 억울한 박해와 냉대와 심지어는 오해까지를 우리는 가끔 사제직에서 더 많이 받는다.
평신도사도직의 발전을 위하여 주교회의에 바라고 싶은 것은, 우선 사제들의 평신도사도직 인식에 대한 후진성을 극복해줍소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구령을 위하여 사제직이 존재하는 것이지, 사제직의 신품권을 위하여 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각 본당이 구속사업의 계속 확충에 대한 강력한 「프레시디아」가 되지 않고, 교회 치교권의 말단행정기관으로 자처하고만 앉은 곳이 단 한곳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으며, 그런 곳이 있는 한 우리 교회는 밤낮 가야 인구증가율을 못따라가는 교우증가율 밖에 못가질 것이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부 성직자들이 평신도사도직의 추진을 교회의 「제2의 권일신」화로 기우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신도 사도직 자체에 대한 연구부족으로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며, 현대의 가톨릭 교회 안에는 「제2의 권일신」이 나타날 걱정조차 나타날 건덕지가 없다. 아마 그것은 안직도 관존민비사상에 물젖은 지시주임의 기우나 비슷할 것이다.
주교회의에 바라고 싶은 둘째의 것은 평신도사도직 형성의 제도화이다. 그것은 특별한 「프로」선수를 양성할 필요도 없다. 다만 평신도 사도직의 본질을 파악하고 실전에서 신도중의 「엘리트」를 붙들어 오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평신도 사도직이 한 직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심단체로서 「연령회」를 갖는 것과 장의사를 경영하기 위하여 「연령회」를 갖는 것은 자원봉사로 성가합창대원이 되는 것과, 급료를 받기 위하여 성가대원이 되는 것과의 차이와 같다.
따라서 확고한 수입이나 직장을 가지면서도 평신도사도직에 헌신할 수 있는 「엘리트」들을 교회가 활용하려만 들면 평신도 사도직 형성 문제는 그다지 큰 애로가 없이 타개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평신도 사도직 형성에 공식적인 관심을 표명한지는 오래나, 제도화 또는 강제화된 평신도사도직 형성이란 아직껏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본당은 본당신부의 자유재산이요, 신자는 신부의 자녀요, 종(세르부스)으로 밖에 안된 곳이 가끔 있다.
셋째로 바라고 싶은 것은 「로마」에 있는 「평신도사도직 상임위원회」 같은 전국적인 협의체의 구성이다. 평신도사도직이 오늘의 교회의 과제도 세계의 문제인 것을 알고 쇄국적인 장벽에 들창이라도 하나 만들고,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고 이쪽 소식도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상설기관이 없이는 우리의 평신도사도직은 언제까지 동면을 계속할지 모른다. 전문적인 연구와 신지식의 소화 없이 진보가 있을 수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자기 직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설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평신도사도직이니 무어니가 없이도 전교회장만 가지고도 전교가 좀 잘 되었는가? 또 그러한 유능한 직업적 회장들이 하는 일이 바로 평신도사도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나오는 한 이 땅은 아직도 평신도사도직의 미개척지이다. 평신도사도직의 필요성이란 실로 이 땅에 60만 교우에 5백명 신부밖에 없다는 그 사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 후반기 현대문명 속의 세속과 육신이 우리 영혼에 도전해 오는 그 인해전술을 막아내는 문제에 더 큰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구속사업 계쏙과 확축을 위하여, 과거 19세기 동안 당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태에 대한 새로운 전술이 바로 평신도사도직이라는 점을 우선 명심하고 들어가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