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白書(전교백서)] 찢어진 設計圖(설계도) (상)
敎會運動(교회운동)에의 衝擊(충격)에 對(대)하여
해야할 焦急(초급)한 것은?
黃金期(황금기) 머물지 않아
冬眠(동면)에서 깨어나 우리도 改革(개혁)해야
使命認識(사명인식)이 緊要(긴요)
「平信(평신)」 參與(참여) 促求(촉구)해야
전 국무총리 요안 장면 박사는 전교에 관심이 깊은 분이다. 그가 젊었을 때 미국에 유학간 것은 교리를 철저하게 연구한 다음 귀국하여 전교하기 위함이었다. 귀국하여 곧 착수한 것이 「敎父들의 信仰」의 번역이었다. 번역은 끝냈으나 출판비가 없어 기회를 기다리던중 그의 처조카 안나 김(金斗任) 여사가 전액 부담을 자처하여 초판 4천부가 나오게 되었으니 때는 한창 물자가 궁핍하던 지난 전쟁말기(1944년 7월)이었다. 그때 외국인 신부들도 어쩌면 이렇게 좋은, 또 이렇게 큰 책이 이처럼 많이 발간되었느냐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때부터 극한문을 아는 「프로테스탄」 신자가 가톨릭에 개종함에는 이 책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앞으로도 있을 때이다. 시공관(지금 국립극장)에서 불의의 권총저격을 당한 다음부터는 외출이 심히 부자유스러웠다. 그래서 신부들이 매주 몇번씩 순화동 부통령공관에 가서 미사를 지냈다. 나도 1957년 가울부터 1959년 5월말까지 매주 수요일 · 금요일 · 주일 아침이면 공관에 가서 미사성체를 드렸다. 미사후송을 보고나서는 둘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면서 약30분동안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나는 국내 교회소식을 전해주면 장부통령은 정계의 동향이며 외국 가톨릭소식을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 나라는 가장 전교가 잘되는 지역 중 하나인데, 지금끔 신자배가(信者倍加)운동을 일으킨다면 그 성과가 매우 클 것입니다.』 장부통령은 이런 말을 종종 내게 하였다. 나도 전교에 무관심하지는 않은지라 매번 유심히 들었고 또 동감이었다. 그렇지만 나처럼 무능한 존재가 어떻게 저런 운동을 일으킬 수 있으랴. 전국적으로 「신자배가운동」을 일으킨다면 문자 그대로 「배가」는 안된다 할지라도 매년 10만명의 영세입교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5년이면 50만명! 10년이면 1백만명!….
너무 無關心? 人心 쏠리는데
「배가운동」까지 갈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전교 방면에 관심은 있어야 하고 또 무슨 대책이든지 세워야 할 것이었다. 저 공산당이 매사에 정신을 쓰고 모든 기회를 포촉하여 활동하고 있다면 가톨릭이 이처럼 무관심하게 소극적으로 나갈 수 없는 판국인 것도 분명치 않으냐? 다음과 같은 징후들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①나는 전교에 관심 있는 여러 신부들과 교우들의 말을 유심히 들어보았다. 『종교를 믿으려면 천주교를 믿겠다』는 것은 거의 전국적 정평이었다. 이만큼 가톨릭에로 민심은 쏠려있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가톨릭 측에서 적극적으로 무슨 운동을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혹독한 전쟁을 치룬다음 사회불안 가운데 허덕이는 민중은 정신적 의지처(依地處)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 박에선 구할 수 없다. 그런 다른 종교나 교파들은 나날이 속화되고 또 분쟁이 분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톨릭엔 이런 일이 없었고 또 대외적으로 큰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으려고도 아니하였고(기실 못하였지만) 정계에 나간 몇몇 교우들이 양심적으로 굴었다. 전교방면에 무슨 적극성을 띠지도 않았지만 가톨릭의 이런 둔중(鈍重)한 태도를 만중이 믿음직스럽게 생각한 연고이었다.
精神 慰安주는 가톨릭的 魅力
②그때는(1959년) 명동본당 정문 안에는 둥근 화단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성모석상이 서있었다. 그런데 이 성모상을 배경으로 하고서 사진을 찍어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교우아닌 비가톨릭자들이었다. 이런 것도 무심히 보아넘길 것은 아니다.
③명동대성당 앞길을 지나가는 비가톨릭자들 중에는 대성당을 쳐다볼 때 약간의 정신적 위안이나 양심의 가책 등 종교심을 느끼는 이들이 상당히 있었고 그 앞길 뿐 아니라 종로2가를 지나가면서 부러 한번씩 이 대성당을 쳐다보고 가는 비가톨릭자들도 상당히 있었다. 종3에 소굴을 두고있던 사창(私娼)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있었다. (지금은 현대식 화장을 한 병원이 주제넘게 머리를 불쑥 들고 있어 대성당의 존엄성을 절반이나 죽이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도 비가톨릭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
④수도복을 입고 대학에 다니는 「학생수녀」들이 각 회에 꽤 있었다. 학교에 가면 개밥에 도토리처럼 따돌림을 받아 고독하지 않더냐고 물어보면 다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교수들도 좋아하고 학생들은 모두 좋아하더란다. 남쪽 어떤 대학에 여승이 승복(僧服)을 입고 학교에 나가니까 학생들이 뒤에서 돌팔매질을 하더라는 사실과 대조하여 보라!
메스콤의 影響
⑤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간접으로 관계되던 영화들 - 「王中王」 「골고타」 「聖衣」 「구오봐디스」 「銀배」 등등 영화가 그처럼 인기를 독점하던 이유는 무엇이던가? 찬란한 화면이나 배우들의 연기에로만 돌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⑥1952년에 초판을 발행한 「宗敎의 根本問題」가 1959년에 4판을 발행하고, 부산 피난시절에 2판을 발행한 「敎父들의 信仰」이 역시 1959년에 5판을 발행하게 되었으나 이런 저교용 책자들을 구교우들이 그처럼 많이 읽는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⑦매년 예수성탄 첨례가 되면 시내 모든 일간신문들은 사진과 함께 「크리스마스」 기사를 크게 취급하기 시작하여 한 전례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문들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것이다.
⑧서울에 있었던 성모성년대회의 행렬이며 순교자현양대회의 행렬이며 대구시 성체거동의 행렬이 시가지를 뚫고나갈 때 좌우 노변에 성을 이루고 있던 군중들은 조소나 야유를 하는 일 없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망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종교의 행렬이 이처럼 시가지를 관통할지라도 군중의 태도가 그러할 것인가.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敎會出版物
⑨나는 가톨릭을 옹호하기 위해 1957년 「思想界」 지상에 함(咸)모씨와 몇번에 걸쳐 논전을 한 일이 있다. 그때 「思想界」지의 발행붓수는 약5만부이었다. 그런데 우리 논전이 실린 그 잡지는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서점에 나타나는 그 날로 매진되어 버렸다. 이것도 심상하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었다. 만일 불교나 유교나 천도교의 교리에 대한 논전이 벌어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들의 관심을 저처럼 끌지 못하였을 것은 확실하다.
⑩교회서적은 각 본당을 통하여 나간다. 교회서적의 판매실적을 보면 지방에 전교가 어떻게 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 출판협동조합을 통하여 사회 각 서점에 내보내보았다. 뜻밖이다. 매월 평균 매상고가 20만환을 오르내리고 있다. 교우들이 다 사간다고 볼 수는 없다. 그 교회서적을 사가는 비가톨릭자들은 모두 그것을 한번 읽어볼 것은 틀림없다. 다행하고 신기한 현상이다.
⑪가톨릭 중앙협의회(CCK)에서는 교리통신교수를 하고 있다.
한번 신문지상에 광고하면 매번 가톨릭 교리강의록을 신청하는 사람이 수천명씩 된다. 동 강의록은 무료이고 또 얼마나 영세자를 내는지 분명치 않으나 여하간 이것도 진기한 현상이다 동회 예산관계로 신문광고를 자주 낼 수 없다 한다. 사무원을 증원해야 되고 발행부수를 배가해야 되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을 무심히 보아넘기는 교역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敎理講習會
⑫가톨릭이 전교운동에 소극적으로 무관심하게 지낼 수 없다고 몽둥이로 우리 태만한 머리를 내려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교리연구생들의 격증이다.
나는 수복 이후 매주일 오전이면 내 사무실에서 남녀 「인테리」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교리강의를 하였다.
청강생들은 점점 많아져 만원을 이룬다.
20명이면 만원을 이루는 방이다. 지원자는 더 생기므로 한달후에는 주일 오후반을 시작하였다. 역시 만원이다. 지원자들은 계속하여 오므로 한달후에는 토요일 오후반을 열었다. 또한 만원이다.
이렇게 연중 무휴로 몇해를 지냈다.
그렇지만 내가 성세성사를 주지는 않았다.
각 본당에로 찾아가라고 매번 부탁하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래야만 교리찰고 때문에 공부를 하게되고 그래야만 본당신부를 알게되며, 따라서 다른 교우친구를 갖게되기 때문이다. 냉담방지에 이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58년 봄부터는 명동본당 주최로 이 교리강좌를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첫번 강좌를 위하여 「경향신문」에 광고를 한번 내보았다. 1백여명이 모여들어 의학부 교실 하나를 꽉 채웠다. 두달 이후에 토요 강좌를 시작하였더니 역시 교실 하나를 꽉 채웠다.
秘訣은 무엇?
선전효과의 지대함을 느끼고 다음부터는 「경향신문」뿐 아니라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에도 동일동시에 광고문이 나타나도록 하였다. 광고문에는 무슨 「강연회」니, 무슨 「사상강좌」니 하는 문구를 부터 쓰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정도 이상의 남녀구독자 영세입교를 위한 교리강좌」임을 밝혔다. 동시에 지원자는 미리 사무실에 와서 신청서에 기입하고 「수강증」을 받아가라고 일러두었다.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은 강의실 입구에 앉아서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강증 번호를 물어 출석부를 그어가도록 마련이었다.
얼마나 모일 것인가는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7백여명… 두달후 토요강좌부터는 매넌 1천여명… 거의 전부가 청년이요 여자는 4분지1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때 「프로테스탄」 신학교를 졸업한 어떤 여성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등포 어떤 예배당에서는 부흥회를 연다고 비라를 뿌리며 나팔불고 북치면서 가두선전을 굉장히 하였어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비명을 울렸는데 여기 와서 보니 「수강증」을 타느라고 그처럼 법석대고 있으니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시간을 지킨다. 강의시간 정각에 강단에 올라서면 강당 아래윗층을 꽉 채운 청강생들은 이미 자리를 정돈하고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개강 시작 후에 들어오는 사람은 열손가락으로 헤일 정도에 불과하였다.
梨大의 4倍
강의가 끝나면 청강생들은 일어나 우루루 몰켜나간다. 그중에는 『아이고! 선생님도 오셨읍니까』하고 인사하는 대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 교수와 학생들이 한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래서 주일 오전이면 「특별강좌」를 다시 열었다. 여기에는 교수 · 교수 · 언론인 · 의사 · 문필가 등등 남녀 30여명이 모였다. 만일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미리내」 산촌에 가서 허송세월을 아니하고 지금까지 이상 세가지 강좌를 연중무휴로 끌고나왔을 것이다. 지금까지라면 5개년이오 5개년이면 45개 강좌가 지나갔을 것이다. 45개 강좌라면 비가톨릭 남녀 청년 3만여명이 가톨릭의 요령을 청강하였을 것이다. 3만명이라면 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총수의 4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니냐?
50萬환 懸賞
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우리나라 천주교의 소지(素地)와 여건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나같은 무능한 존재가 어찌 「신자배가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을 주교회의에 제출한다 할지라도 구체적 방안이 없는 한갖 이론이라 하여 통과되지 않을 것은 십상팔구이오, 설영 통과된다 할지라도 회의록에 문서상으로만 남아있을 뿐 별 영향을 내지 못할 것은 십상팔구이다.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그대로 허송하고 말 것인가. 「신자배가운동」까지는 못간다 할지라도 전교운동에 무슨 충격을 일으켜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게도를 짓고 있었다.
그때 내가 편집하던 「경향잡지」를 통하여 「현상논문」을 모집한다. 논문의 내용은 재정이 넉넉지 못한 본방인 교구를 표준으로 하고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있게 전교를 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계시함이다.
잡지 속에 논설을 통하여 이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잡지 4면에는 틈직한 활자를 써서 선동적 광고를 낸다. 현상은 「50만환」이다.
그당시(1959년 봄) 50만환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이 광고를 4개월 연속해서 낸다. 그러면 한국 교중의 주목과 관심은 이 50만환 현상논문에로 쏠리고 말 것이다.
倍加設計圖
논문 수백통이 응모될 것이다. 뜻맞는 사람 몇명으로 심사위원회를 결정하고 제일 잘된 논문 하나를 뽑아낸다. 그럴지라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방안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편집실의 비밀을 누가 알랴. 나는 그 당선논문 그럴듯한 곳을 끊고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기입할 것이다.
사단은 사단장에게 달렸다. 새로 사단장이 부임하면 그 인격 · 기백 · 사상 · 정신의 여하에 따라 사기는 일변한다. 사병 · 장교 · 무기는 그전것 그대로 할지라도 사기는 일변한다.
더구나 전쟁때 그러하다. 같은 수군(水軍) 같은 무비 같은 거북선이지만 이순신 장군이 나가서 전투를 지휘하면 번번히 승전하였고 같은 수군, 같은 무비, 같은 거북선이지만 원균이 사령관으로 나가서 지휘하면 번번히 패전하였다.
司令官 · 作戰
포교전선에 일선사령관은 각지 본당신부들이다. 모든일의 거의 전부가 이 사령관들에게 달렸다. 본당신부가 학교에 관심있으면 어떻게든지 그 학교는 차츰 잘되어가고 본당신부가 유치원이나 병원에 정신을 쓰면 그런 기관은 그만큼 나아진다. 본당 신부가 외교인 전교에 무관심하면 그 본당지구 교우들 전체가 무관심 하여지고 그에 따라서 외교인 영세입교는 가뭄에 콩나기 격이 된다. 그와 반대로 본당신부가 외교인 전교에 힘을 기울이면 남녀교우들이 이에 호응하고 따라서 입교영세자도 점점 많아진다. 그 실례를 들어보자.
6·25 동란 충남 천안에서 공산도배에게 납치되어간 불란서 외방전교회 심신부(R. P. POLLY)가 그 본보기다. 그 신부는 어디 가든지 비가톨릭자 전교에 문자 그대로 열중하였다. 그처럼 전교가 안되던 일정시대이라도 그리고 전교 안된다고 이름난 지방이라도 그 신부가 한번 부임하여 활동을 시작하면 일가월증 효과는 빛났던 것이니 강원도 원주시가 그러하였고, 경기도 수원시가 그러하였고, 충남 대전시와 천안시가 그러하였다.
여기는 韓國
본당신부가 전교하겠다고 한번 결심을 세우면 지방에 따라 적당한 방법은 제절로 생각나게 마련이다. 회장회의 · 명도회 · 청년회 · 교리강좌 · 출판물이용 · 위험대세 장례식 · 친목회 · 찬조기구회 등등-
그런데 위에 말한대로 전교의 소지와 여건은 극히 양호하여 현금 지구상에서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외국의 정평도 듣고 있는 이 판국에, 그것들이 요구하는대로 풍성한 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그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극소수의 일선 사령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전교의 「정신」과 「사상」이 결핍되어 있는 그 빈곤상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런 정신과 사상의 교육을 받아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필요성이 여기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내가 17세에 신학교에 들어가 28세에 신부가 되었다. 그동안 무수한 강론을 듣고, 묵상지도를 받고 하였지만 비가톨릭자들에게 전교할 이무에 관한 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불란서나 스페인 한 복판에 있을 신학교이었지, 앞집이 외교인이고 뒷집이 외교인이고 한 우리 한국에 있을 신학교는 아니었다.
오는 10월 26일이면 내가 신부된지 벌써 33주년이 된다. 그동안 해마다 무수한 피정강론을 들어왔지만 외교인들에게 진리를 전할 필요에 대한 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이태리나 애란 같은 나라에 있을 사제피정이지 캄캄한 암흑속 외교총중인 우리 한국 「전교신부들」의 피정은 아니라고 본다.)
主敎님들께
비록 대부분의 일선 사령관들이 이런 상태에 있을지라도 이들을 지도하는 중앙 총사령관격인 각 교구 감독들이 진지한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포교전선을 지휘한다면 전세는 용이히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자면 입 속에 발린 말 뿐 아니라 단호한 주장을 가지고 일선사령관들을 줄기차게 지휘함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니까 지방교회 순시때 견진성사나 주고 축하식이나 받고서 무심하게도 훌쩍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 지방 전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일선사령관에게 전항을 물어보며, 무슨 전술을 쓰는지 또 쓸것인지를 따져볼 것이며, 이 사령관 앞에 남녀전도사나 전교에 힘쓰는 교우들은 인견하고 그들의 활동상태와 결심이며 전교상 주위환경의 좋고 나쁜 점을 알아보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보며 격려하기를 궐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큰 첨례를 지낸 다음 일선사령관을 매번 첫번으로 만나거든 대인영세자가 몇명이나 낫는지 알아보아 치하도 하고, 현금 영세 예비자는 몇명인지 물어보아 격려도 할 것이다. 총사령관이 줄기차게 이런 관심을 가지고 지휘하다가 전교에 무관심하거나 태만한 일선사령관을 발견하거든 전교가 가장 안되는 산골본당에로 전근시켜 구교우들이나 지키게 할 것이다.
궁벽한 산촌 우몽한 백성들에겐 힘은 힘대로 들여도 전교가 잘 되지 않는 것은 현금 한국이나 예전 로마제국시대나 마찬가지다. 저때에도 도시민이 먼저 영세입교하였고, 촌민은 나중에 따라 나왔다. 그래서 지금 「라띤」어(예전 로마제국의 국어)에 외교인을 「빠가누스=PAGANUS」라고 하는데, 그 어원인즉 「촌민」이란 뜻이다.
敎理硏究會
총사령관이 이처럼 진지하게 「사상」과 「정신」을 가지고서 포교전선을 지휘한다면 여기에 끌리어들지 않을 일선 사령관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위로 올라갈수록 노력보다는 「정신」을 쓰고 있느냐….
그리고 각 교구본부에는 총사령관 직속의 「교리강좌」를 상설할 것이다. 이것은 연중무휴로 나가도 좋고 연중 몇개월씩의 연례(年例)적으로 나가도 좋다. 이 기관에서 할 일은 다음 두가지다.
①전교사와 전교수녀들은 재훈련 또는 양성하는 것이다. 각자가 서적만 읽고서 충분한 교리지식을 얻는 것도 지난할이오, 각 수녀원에서 교리교육을 완전히 시키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이다. 그들이 각 방면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어가며 연구에 전력할 필요가 있다. 정부에서는 해마다 공무원들을 일정한 기간동안 재훈련시키고 문교부에서도 해마다 일선 「교사」들과 유치원 「보모」들까지 재교육시키고 있는데 우리 한국 가톨릭은 왜 이처럼 팔짱끼고 벙어리로 지낸단 말이냐?(1959년 봄 현재)
平信徒의 參與
②교리교사를 양성한다. 어떤 본당지구든지 의식이 과히 곤란치 않고 표양도 좋고 표현력(언변)도 좋은 남녀 교우들이 있다. 이들을 모집하여 함께 훈련을 시킨다. 기숙비와 왕복여비는 본부에서 담당한다. 숙소는 문제없다. 각 교우가정에 하나씩 맡겨도 좋다. 과목은 철학개론 · 철학사 · 성경 · 교리신학 · 윤리신학 · 교회사 · 우리나라 역사 · 동양사 · 서양사 · 인류문화사 · 자연과학 상식 · 교리교수방법론 등등-
주교좌가 있는 곳이면 신부들이 많다. 한 과목씩 떼맡길 것이오 어떤 과목은 성지자가 맡을 필요는 없다. 대학교수도 좋고 고등학교 교수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전교에 관심 깊고 체험많은 신부나 남녀전도사들의 강화나 경험담을 들려준다.
아침 묵상은 자기성화(聖化)를 저녁강론은 천주사랑 · 교회사랑 비가톨릭자들의 영혼구할 필요 등을 중심으로 엮을 것이다.
이렇게 3개월이고 6개월 간이고 훈련시킨 다음 시험을 보아 합격자들에게는 「교리강사 자격증」을 졸업식장에서 내어준다.
이런 자격을 얻은 남녀교우는 유급 전도사로 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는 자는 자기 본당에서 무급 봉사자로 예비자들을 위하여 교리강좌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몇해 동안 총사령부 본부에서 연례적으로 훈련생들을 내보낸다면 각 본당지구에는 교리강사 자격증을 가진 남녀교우가 몇명씩은 있게 될 것이다.
「붐」은 必要해
공산당에서는 끊임없는 밀봉교육을 통하여 열성분자들을 사회 각 방면에 침투시킴에 침식을 잊고 지나지 않느냐? 그렇거늘 한국가톨릭은 현고마과 같은 좋은 소지, 좋은 여건 밑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냐?
위에 말한 훈련기관(상설교리강좌)을 상설하는 것은 본당 하나를 신설하는 것보다는 힘이 덜 들고 효과는 몇배로 더 클 것이다. 요는 일선사령관과 그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정신을 써가며 지휘하면 되는 것이다.
일선사령관들은 예비자들을 모아 교리강사들에게 교리강좌를 시켜주기를 요청할 것이다. 이런 일을 아직 못하는 이유는 자격(교리지식과 열성)이 부족한 연고이다. 고로 훈련을 받고 나온 남녀 강사들은 한주일 동안 한번이나 두번의 교리강좌를 사양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상설 교리강좌의 주요목적을 여기에 두어야 한다.) (계속)
尹亨重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