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에 예수 다시 「디로」 지경에서 나오사 「시돈」 근처로 말미암아 「데가볼니」 지경 사이로 지나사 「갈릴레아」 바닷가에 이르시매 귀 막히고 벙어리된 자 하나를 주께 데려오고 손으로 만져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 저를 백성 중에서 따로 이끌어내시고 당신 손가락을 그 귀에 넣으시며 춤을 뱉아 그 혀에 바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가라사대 「에페다」하시니 이는 열려라 말이라. 즉시 그 귀가 열리고 그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분명히 말하는지라』(말구 7.31절-35절)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오늘 주일복음에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벙어리된 자를 낫게하여 말할 수 있게하여 주셨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은 남을 비방하며 이간을 붙이며 사기를 잘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입으로 천주님을 찬미하고 천주님께 영광을 드리며 영혼의 신익을 얻게하려고 하는 뜻에서 말할 능력을 주셨읍니다.
우리는 다행하게도 천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날 때부터 자유로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읍니다. 그러나 우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천주님의 창조 의도(意圖)와 섭리를 거슬러 왔읍니까! 세상의 죄악을 살펴볼 때 그 죄악의 대부분이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나오는 결과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읍니다. 하루를 되살펴 볼 때도 혀로써 천주님을 찬미하였거나 기쁨을 드렸다기 보다 오히려 천주님을 거사려 모독하며 슬프게하여 드린 것 뿐입니다. 사람이란 몇 사람만 모이면 영신생활에나 육신생활에 어떤 유익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보다 먼저 이웃집 똘똘이 어머니는 어떻고 저 앞집 영감님은 어떻다는 등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기에 바쁘고 꼬집어 뜯기에 바쁩니다. 한 번 이런 이야기가 나면 일하던 것이 어떻게 되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쓰며 새벽닭 우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 신심이 있고 열심하다는 교우들 중 어떤 사람들은 또 교회와 성직자 수도자와 좀 가까이 산다는 교우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성직자 수도자들에 대한 결점을 찾아 비방하기에 여_이 없읍니다.
그것도 사실 그런 결점이 있으면 모르겠으되 없는 사실을 그럴뜻하게 꾸며내며 또 아주 적은 일을 과장하여 말하는데는 그 지능이 비상합니다. 설사 성직자·수도자들의 어떤 결점이 사실 있다해도 신심있는 신자로서 또는 교회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 당자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기구하여주며 그 결점이 더 드러나지 않도록 교회를 아끼는 마음에서 막아야하지 않겠읍니까!
또한 어떠한 큰 결점이 확실히 있어 교회와 신자들에게 해가 미칠 우려가 있으면 이야기꺼리로 삼지 말고 조용히 교회당국에 알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읍니까! 이런 사람은 성교회를 해치고 좀먹는 기생충과 같다고 할 수 있읍니다.
『자기에게 싫은 것을 남에게 하기를 원치 말라』고 예수님께서 똑똑히 말씀하셨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결점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더구나 없는 결점 사실처럼 전파될 때 크게 격분합니다. 자기가 싫어하면 남도 그만큼 싫어함을 알아야 하겠읍니다. 우리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남을 아껴줄 수 있읍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너희도 판단함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한 두 가지의 결점을 가지고 있읍니다. 자기의 결점은 덮어두고 어찌 남의 결점을 들추어낼 수 있겠읍니까! 바리세이들이 간음하다 들킨 여인을 잡아 예수님 앞에 꿇어 앉혀놓고 예수님의 판단을 기다렸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돌을 못 던지고 그대로 다 돌아갔읍니다. 우리가 만일 죄인으로 죄인에게 돌을 던진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지겹게 생각하시던 바리세이 무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이며 결국 심판에 무서운 판단을 받게될 것입니다.
경애하는 신자들이시여!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은 다만 천주님을 찬미하고 영혼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죄스런 말로써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지 말고 유익한 말로써 영혼의 신익을 얻어야 하겠읍니다. 먼저 성당에서 공동으로 신공할 때 주를 찬미하기를 인색하지 맙시다. 신덕을 증거하거나 도덕을 변호하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읍니다. 고민하는 사람에게와 실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과 위로의 말을 하기에 인색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를 찬미하는 것이며 영혼의 유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주여 내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곧 내 입이 너를 찬미하리라』 아멘.
李東鎬 神父(경북 성주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