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34) 장미꽃 ④
발행일1964-02-02 [제409호, 4면]
『복순아…』
아버지의 음성은 노기가 가득차서 쇠소리로 변했다.
『백장미를 누가 잘랐냐?』
복순이는 부엌에서 밥을 하면서 「라듸오」에서 배운 연속극의 주제가를 흥겹게 읊다가 눈이 방물이 되어 아버지를 바라본다.
『난 몰라유…』
『이년은 무어든지 모른대지?』
욕을 먹은 복순이는 얼굴 빛이 푸르락 붉으락 해지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순아…』
이번에도 쇳소리가 튄다 얼핏 문장지 옆을 떠나 책상 앞으로 와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장지문이 거칠게 열린다.
『아침에 너 백장미 봉오리 보았지?』
『네에. 피었에요?』
시침을 떼고 물었다.
『그 백장이 봉오리가 없어졌단 말야, 어떤 년이 꺾었니 너 모르냐?』
『그 아까운 꽃을 누가 꺾었을까?… 애들이 또 물려들어와서 꺾었나 보죠』
하며 나는 꽃밭을 내다 보았다.
이때 부엌에서 시큰시큰 울음소리가 났다.
『미친년 밥하다 말고 왜 우니?』
아버지는 부엌문 앞으로 가서 복순이를 노려본다.
『내가 뭐 도딕질을 했시유, 이년 저년 하게!』
복순이는 부엌 뒷문 기둥에 이마 붙댄채 항변을 한다.
『이년아, 누가 들어와서 꽃을 잘라가는 것도 몰라?』
『또, 이년이라네!』
복순이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아까보다 『옥타브」를 높여서 운다.
『아니, 너보고 이년이라고 좀 하면 어떠냐?』
아버지는 조금 주춤하면서 그래도 소리친다.
『이년이 뭐 내 이름인가유!』
『아니, 저게?…』
아버지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다. 행동이 느리고 시골뜨기로만 알았던 열일곱살짜리 복순이가 제법 말대답을 하는데는 사실 나도 좀 놀랐다. 속으로는 코가 시원하기도 했다.
『미친년! 왜웃냐?』
내 입가에 나도 모르는 웃음이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입술을 다물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화풀이 할데가 없어 마당에서 혼자 중얼대고 있는 아버지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두팔로 턱을 고이고 힘껏 속으로 웃었다.
또 하나의 내가 이러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순아 너도 변했구나? 능글맞은 계집애가 되어가는구나?』
『헐 수 없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그러한 복수행위가 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가볍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걸』
턱을 고인 「나」는 버틴다.
대문소리가 나더니 누가 온 기색이다. 귀를 기울이니 뚱보 사장이 백장미를 구경하러 온 모양이다.
『백장미 어디있소?』
『글쎄, 동리 애 놈의 새끼가 잘라 갔군요…』
『저런…』
『애비 애미가 애 새끼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남의 꽃밭의 꽃을 잘라내게 하느냐 말이요…』
아버지의 이 말에 나는 입 속에서 대답했다.
『그 애새끼는 바로 당신의 딸이고, 꽃을 꺾도록 한 것은 당신이야요.아버지가 귀여워하는 물건을 망치고 싶은 감정을 누가 나에게 부어주었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양부인 당신이야요.』
나는 턱을 고인채 나이먹은 여자같이 픽 웃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니 두 남자 어른들의 화제는 돈벌이 장사 얘기로 흐르고 있었다.
공부도 손에 거치지 않아 소설책을 폈는데 그것도 머리속에 들어오지를 않아 다시 턱을 고이고 멍하니 바람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양부한테 반항하고 복수하는 내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나는 아주 거짓말장이가 되어비리는 것이 아닐까. …)
갑자기 내마음 속에 지저분한 것이 꾸적 꾸적 들어간 것 같이 꺼름칙 하다.
『나순아 더운 물 있거든 홍차 좀 내어 오너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명주실 같이 부드러웠다.
더운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니까 아까 울던 복순이는 연속방송극 주제가를 다시 읊으고 있었다.
『복순아 너 이런 집에 있기 싫지?』
나는 주전자에 더운 물을 받으며 물었다.
『딸한테도 이년 저년하는데 네가 좀 욕먹는거 고깝게 생각 않기로 했다니…』
하고 픽 웃는다. 아까 항변하고 어굴해 하던 감정의 실마리는 찾아 볼 수도 없다.
나는 홍차를 넣어 안방으로 가지고 가며 그렇게 맘을 금방 달낼 수 있는 복순이가 부러웠다.
찻잔을 아버지와 뚱보사장 앞에 갖다 놓을 때, 그들의 화제는 미군에서 불하받은 폐물로 부자가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로 쏠리고 있었다.
『나순아…』
안방을 나서려고 할 때. 뚱보사장이 부른다.
『네…』
『나순이가 안다는 그 양키 말이야… 나순이하고 친하지?』
『…………』
『다시 한번 청을 넣어 보아! 아버지도 그 생각이시니까?』
『무슨 청이요?』
『깡통이며, 병이며, 상자며 그밖에 버리는 물건들 말이다. 우리에게 달라고 해보렴…』
이번에는 아버지가 말한다.
『…………』
나는 말 뜻을 자세히 몰라 침묵을 지켰다.
『네가 한번 잘 부탁하면 들어줄 듯 하다고 하지 않았니?』
아버지의 자세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나는 이때 백장미를 자르던 그 고약한 감정이 또 머리를 쳐들었다.
『그까짓 양키 자식, 이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영어도 배울 겸 만나면 어떠니?』
뚱보사장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사실, 그 양키 한테서 영어 많이 배웠지요!』
아버지도 맞장구를 친다.
『학교 아이들한테 놀림 받기 싫어서 만나기 싫어요.』
나는 딱 잘라서 대답을 하고는 안방을 나와버렸다.
(돈벌이 일을 꾸밀때는 양키 좋다 하고, 내가 진정 그 청년이 좋아서 만나면 집 망신시킨다고 하는군!)
건너방에 돌아오자 자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색경을 보고 입을 비죽하게 내밀었다. 나도 좀 명랑해 지기 위해서 복순이를 따라서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노래의 소질이 없는지 아직도 노래를 읊을 기분이 못되는지 내 목에서는 「멜로디」가 나오지를 않고 이 앓을 때 비슷한 소리가 나온다.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턱을 고이고 앉았다. 딕슨의 얼굴이 보오얗게 뇌리에 번지고 한 모퉁이에는 김진호 얼굴과 성당 뽀족탑이 서린다.
이튿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숙과 해어져서 혼자 「뮤직홀」로 갔다. 딕슨이 와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뒤섞이면서 나는 「뮤직홀」의 어스름한 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