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에 期待(기대) - 새 劃期(획기)에 즈음하여
當面(당면)한 問題(문제)들
近代化(근대화)의 雰囲氣(분위기)
발행일1964-02-09 [제410호, 1면]
새삼스레 되풀이 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여름에 「형이하적 산책」에서 만언(慢言)한 것에서 빠지 ㄴ것, 또 보태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을 여기에 적어볼까 한다.
주교회의의 제안이라기 보다 -어른들께서 잘 아셔서 하시겠으니- 평소에 아쉬운 일들을 몇가지 들어보고 싶다. 편집실의 부탁은 「당면한 문제」를 들라는 분부였으나 「문제」는 많으나 그것이 「과제」로서 뚜렷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과제중의 가장 큰 과제는 아마도 지난 공의회가 내세운 「교회의 근대화(敎會의 近代化)」(한국의 제3공화국의 과제인 근대화와는 다르며 더 명확한 관념이기에 혼동이 없도록)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2천년의 교회사에서 그 어느것이고 근대화 즉 새로운 상황에의 대결과 순응을 과제로 하지 않았던 공의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교회의 성장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일련의 근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실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연륜은 환경과 새로운 상황에 대한 힐항(詰抗)과 동화작용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전교회의 이러한 대작업은 지엽(枝葉)에서 이미 취급되고 결과를 본연 후에 상정(上程)되었다는 것이 이번 공의회에서 더욱더 명확히 판명되었다.
예전(禮典)의 근대화, 토착화(土着化)라는 문제만이라도 그것은 이미 30년 이래에 독일서 일어나서 전례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문제에서 발전된 것이다.
교회의 각 지역과 집단은 부단히 근대화 하여왔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돌이켜 한국의 교회를 본다면 우리가 누차 지적한 바 있지만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현재까지 전진한 선까지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시발했던 위점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전제조건이며 한국교회의 당면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공의회에서 의결된 근대화의 제혁신안의 한국에 대한 적용은 미리 「전근대화」라는 과정없이는 한국에서는 도리어 해를 끼칠가 두려워한다. 즉 한국의 교회는 먼저 근대화를 단행할 만한 소지(素地)와 예비여건(豫備與件)을 그리고 분위기를 조성함에 과감해야 할 것이며 그래서야 세계교회의 근대화란 공동전선까지 보조를 맞춤에 졸속(拙速)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여 몇가지 구체적 의견을 개진하여 보겠다.
이것은 말할나위도 없이 각 교구마다 공의회의 정신에 접근하도록 독자적인 노력이 있을 줄 생각되니 여기서는 한국교회 전체가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현재 있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를 강화하는 것이 교회의 근대화로의 제일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을 한국주교 및 각 수도단체의 대표기관으로 확장해서 명실공히 초교구적 체제를 정비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성회법상의 권리의무는 없으나 대내적 충실과 대외적 발전을 도모함에 유익한 기관으로 육성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각 분야에 있어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유능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 각층에서 적재를 적발해서 등용해야 옳은 발전이 기대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각 위원회가 유기적으로 능률적으로 활동하여 중복되고 분산된 노력의 허비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 협의회는 미국의 전미 가톨릭복지협의회(NCWC)의 조직을 참고로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여기에 하나의 예로서 가톨릭악숀(ACTIO CATHOLICA)과 전교, 정치사회, 예전 및 교회, 미술, 음악, 자선복지사업, 교육문화, 공보 등의 제문제의 위원회 등을 들 수 있다. 그외 긴급한 당면문제에 대해서도 적기(適期)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기동성과 무진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치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 중에 특기할 수 있는 것은 이번 공의회때에 보편적 과제로서 제시된 교회용어의 현대화 및 평이화(平易化) 예전교회미술음악의 토착화 등이 연구기관의 설치 문제가 있다.
그밖에 한국교회의 절박한 과제는 공용교리문답과 기도문의 개정인데 이것은 용어의 현대화 및 평이화가 앞서는 것이다.
이미 왜관에서 새로운 경문의 시도가 발표되었지만 이것은 과감한 선구적 거사이며 또 신용어도 우리가 듣기에는 서울서 「뉴먼 아소시에이션」의 학자들이 일을 시작했다는데 이러한 자발적인 노력과 「이니시아티브」를 탄압이나 이단시 하는 것 보다는 「교회용어 제정위원회」를 각 분야의 인사로써 구성시켜 그러한 성과를 검토하고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건설적인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구태어 주교회의에 제안하기 보다는 한구굑회의 성원 전체가 자기비판, 성찰을 해봄이 어떨가 한다. 교회는 자기의 현 위치를 측량하며 진단을 내리는 것을 전면적인 과제로 삼는 것이 천 단계라고 생각된다.
최근 독일의 지도적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공동집필한 「교회의 세력과 무력(無力)」이라는 책에서이다. 프리데리케 괴레스 여사가 『교회는 어떤 의미로는 하나의 장엄한 패어』이라고 한 것은 가려운 곳에 따끔한 일침이며 해방감을 주는 슬픈 고백이지만 또 다시 이어서 용감히 여사가 『이 사실을 우리가 비판하고 그로 인해서 괴롭게 여기는 우리들 자신도 역시 이러한 노쇠현상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탄하는 대신 무엇을 이미 개혁하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덧붙인 것은 기쁜 일이다.
이번 공의회로써 어떤 무엇이 달라졌다면 그것은 이미 원칙이나 추상물이 아니고 정언적(定言的) 실천명령, 즉 그리스도교적 행동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을 경우마다 내리는 것은 교회의 교권의 사명이 아니다. 이 명령을 발견하고 포고 전파하는 일은 그 시작부터 종결까지 평신도의 임무이다. 그들에게 고유한 사도직 그 자체의(가톨릭적 악숀과 구별된) 가톨릭인들의 행동(CATIO CATHOLICORUM)의 할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증언이 되지만 이러한 가톨릭인의 행동을 용납하며 원조하여 뒷받침 해주는 분위기가 한국에서는 아쉬웠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그러나 겨울에 죽었던 나무가지의 잎들은 봄에는 다시 새싹이 트는 것과 같이 교회의 생명에도 『항상 지상의 면모를 새롭게 하는 성신의 영원히 젊은 호흡과 폭풍아래』조락과 발아는 내부적으로서 회기(廻起)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