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前) 청강생들을 모아 학력이나 직업 등을 고찰하여 반을 편성하고 요일과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서 개강을 시작하면 될 것이다.
교리학기가 끝날때가 되면 본당신부는 주일 강론이나 회장 회의며 반장회의를 통하여 신입생 모집을 강조하는 동시 「포스터」나 신문광고로써 이 강좌를 선전할 것이다.
모든 도시와 읍내 본당에 이만한 준비만 되면 그때 가서는 본격적 「신자배가」운동을 펼칠만할 것이다. 이때라도 총사령관의 박력있는 전투지휘는 언제든지 필요하다.
「迂廻作戰」
한국 가톨릭은 다른나라에서처럼 유치원 · 학교 · 강습소 · 병원 · 요양원 · 양로원 등 기관을 통하여 전교하는 우회작전(迂廻作戰)보다는 직접 적진을 돌격하여 나가는 정면(正面(작전을 하여야 할 판국에 직면하고 있지 않으냐?…
이상 요지의 50만환 현상 당선논문이 한번 발표되면 -여러달 동안 일반의 주목을 끌어온지라- 모든 성직자 모든 수도자 모든 유지 남녀교우들이 유별한 호기지심으로 읽어볼 것이오,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시선은 각기 일선사령관과 총사령관의 얼굴에로 모두 쏠려 들리라.
이미 얻은 成果
혹시 독자들 중에는 이런 설계는 한갖 「이상」이나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확실한 설계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이론」 아닌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①사설교리강좌는 있어야 하는 것이고 또 가능한 것이다. 그때(1959년) 원선시오 조(趙仁元) 신부는 경기도 한 구석 가평에서 꼭 그러한 강좌를 상설하고 있었다. 작년말 그것이 서울로 이전되었지만, 일개 촌읍 일선사령관이 하는 일이라면 본부 총사령관은 더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 그 필요성을 깨닫고 결심만 세운다면-
②부산 대청동본당에서는 명동 교리강좌의 실적을 보고서 역시 같은 방법을 썼다.
「포스터」와 신문지를 통하여 교리강좌 광고를 내었더니 남녀구도자 6·7백명이 모여들었다. 곧 반을 편성하고 요일과 시간을 정하여 개강을 시작하였다. 그후 규모를 더 크게 하여 지금은 성분도회 수녀 3명이 매일 각자가 교리강좌를 세번씩 한다고로 날마다 구도자 6·7백명이 교리를 배우러 조수물처럼 성당구내를 드나든다.
매년 1천4백명 가령의 대인영세자를 내고 있다. 이 본당에서 되는 일이라면 도회지 다른 본당에서도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일군은 있다
③전교수녀나 유급 전도사를 둘 수 없는 경우에는 훈련받고 나온 「교리강사」들의 활동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도 공상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1959년) 명동에서는 요안조(曺元煥) 회장이 혜화동에서는 이해남(李海男) 교수가 중림동에서는 대학생 루가 서화택군이 자발적으로 예비자들의 교리강좌를 맡아 매년 허다한 대인 영세자를 내고 있었다.
지금 나의 기억으로는 이 「열성분자」들에 대한 본당의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훈련받은 「교리강사」들을 내세우려면 본당에서 서전과 광고며 강의실 소제와 전등장치, 난방장치, 안내자 등 사소한 점에 머리를 써야하고, 본당신부는 시시로 교리강사들과 교리청강생들을 격려하여 주어야 효력이 클 것이다.
위에서도 말하였지만 중앙에 교리강좌를 상설하여 두고 각 본당에서는 그럴듯한 남녀교우들을 선발하여 훈련을 받고 나오게 한다면 각 도회지나 읍내 본당마다 이런 봉사적 교리강사 몇명을 얻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尹亨重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