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37) 장미꽃 ⑤
발행일1964-02-09 [제410호, 4면]
어둑한 광선 속에서는 사람의 머리는 모두 검으작한 그림자로만 보인다. 전면에 앉은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뒤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으니 눈이 익숙해 진다. 두루 살펴보니 양키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
선듯한 실망이 가슴을 스친다.
(외려 잘 됐어!)
이렇게 말을 가누려고 하면서도 내 눈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로 쏠렸다.
한낱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세계 최고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얼마후에 「홀」을 나섰다. 상당히 오래있다가 나온 것 같았는데 밖은 아직도 환했다. 버스를 타려고 한길로 나오는 골목 어귀에서 반갑지도 않은 미스터 키다리와 마주쳤다.
『미스 양, 「뮤직홀」에 들렀어?』하고 그가 다정히 묻는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딕슨이 「뮤직홀」에 와서 미스양을 찾았어. 만나거든 꼭 「뮤직홀」에 와달라고 하던데?』
『어제, 언제? 』
『바로 이만때 시간인데?』
『……』
발길을 돌리자니 미스터 키다리에게 알리는 것이 싫다. 미스터 키다리는 뚱보사장과 숙질간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뮤직홀」에 간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갈 염려가 있다.
『그까짓 자식, 만나서 뭘해!』
나는 관심이 없는 듯이 말했다.
『딕슨은 상당히 열정적이던데!』
미스터 키다리는 스스로 감동한 듯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속으로는 기뻤지만, 내색은 안했다.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요?』
『나!… 「뮤직홀」에!』
『왜요?』
『난 나대로 만날 「후랜드」가 있어서』
『여자 친구?』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하며, 키다리는 자랑삼아 빙긋이 웃는다. 여섯시 5분전을 가리킨 시계바늘 모양 굽어진 그의 고개는 큰 키가 천정에 치어 휘인것 같다. 얼굴은 그의 호리한 키에 꾸어다 달아논 것 같이 빈대떡 모양 넙적했다.
(저런 빈대떡에 어떤 「걸후렌드」가 생겼을까?)
나는 궁금증이 난다.
『같이 가지?』
그는 제법 나를 아이 취급한다.
『난 안가요』
하고 돌아섰다. 5미터쯤 가다가 돌아보니 그가 안보이길래 슬슬 「뮤직홀」 앞으로 갔다. 키다리의 뒷 모양이 막 「홀」 건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 건너편 양품 가게의 「쇼 윈도」 안을 보는척 하고 딕슨을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까 춘자가 책가방을 집에 두고 온 양 가벼운 몸으로 쫄랑쫄랑 오더니 키다리가 사라진 출입구로 들어선다.
(저 계집애가 웬일일까?)
하는 마음에 곁눈으로 보았더니, 춘자도 나를 발견하고 뜨끔한 표정이다.
(키다리를 만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든다.
『「여섯시 오분전」이 너 기대린다!』
나는 이렇게 넘겨 짚어 보았다.
『뭐라구?』
『키가 커서 치일가바 고개를 휘고 다니는 대학생 말야?』
이순간 춘자의 얼굴은 새벽 하늘의 노을 모양 벌겋게 달아 오른다.
『빈대떡 같이 생긴 대학생과 「데이트」하러 왔지, 다 안다!』
춘자의 오목오목 생긴 코 · 눈 · 입들이 굳어진다.
『어서 올라가 보렴!』
나는 방긋이 웃었다.
춘차는 반찬을 훔쳐먹다 들킨 고양이 모양 「무직 홀」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망서린다.
『못본척 해주께, 어서 올라 가라!』
『…얘 얘 알지도 못하는 소리 지꺼리지도 마!』
나를 쏘아 보더니 춘자는 층계로 사라졌다.
(인제보니 키다리가 여우같은 춘자한테 걸렸구먼…)
나는 「소윈도」에 입을 대고 혼자 웃었다.
한 십오분 가량 서있었으나 딕슨은 나타나지 않기에 단념하고 발길을 돌리는 참에
『나아, 순!』
돌아보니 딕슨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여러날을 너를 만나려고 이만때면 「무직홀」을 찾아왔었다.』
『그래서 나도 여기 서 있었던거다.』
『어디로 갈까?』
『…다방으로 가자』
아직 길거리가 훤하길래 그와함께 걷기는 싫었다. 먼저 오던 골목으로 접어들어 지하 다방에 들어갔다.
차를 시켜서 막 마시려고 하는데 키다리와 춘자가 다방문을 들어서고 있다. 그들은 다행히 우리가 앉은 왼쪽 구석과는 반대쪽인 바른쪽 「북수」로 가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자세를 취하고는 가끔 그들의 모습을 엿보았다.
밖으로 난 창가에 앉은 그들의 얼굴 표정은 먼데서도 「스크린」에 비친 화면모양 역력히 보였다. 빈대떡 얼굴도 싱글벙글, 춘자도 생긋 생긋 웃다가는 손을 입에대 댄다. 얌전을 빼는 것이 춘자 같지가 않았다.
이때 키다리의 시선이 딕슨에게로 쏠린다. 딕슨도 키다리를 보고 손을 들어 아는척을 한다.
『밖으로 나가자…』
나직히 나는 말했다.
『왜? 이 다방은 조용하고 좋지 않느냐?』
『나는 아는 사람 만나는 것이 싫다. 네가 먼저 나가라, 나는 조금 있다가 나갈테다…』
딕슨은 내가 시키는대로 먼저 일어나서 「카운타에 가서 차값을 치르고 나갔다. 나는 일분쯤 후에 뒤를 따라 나갔다. 내 뒤에 그들의 시선이 닿을가 고개를 자라목 같이 수그리면서….
밖은 이미 어둑 어둑하여, 나는 맘을 놓고 딕슨과 함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걸었다.
『너의 나라의 상식으로서는 결혼하는 남자에게 어떤 댓가를 요구하느냐?』
딕슨이 이런 말을 끄집어 내었다.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는 여자를 돈으로 사간단 말도 들었다. 너의 나라도 그러느냐?』
『옛날에 중국서는 그랬단 말을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하다』
『나는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서 그 사실을 읽었다.』
『우리 나라는 그런 일이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전에 너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어쩐지 그런 눈치가 보였다. 내가 오해 한 것인가?』
『그건 너의 오해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니, 깡통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사방이 캄캄해지자 나는 딕슨의 팔에 매달려서 걸었다.
그의 체온에서 무언지 나에게 부족한 것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엇다. 8시반쯤 그와 헤어질 때 우리는 그 다방에서 그 시각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만약 누구든지 못오면 편지를 써서 연락판에 꽂아두기로 했다.
그의 체온은 집으로 돌아오는 불안한 시간에도 내 팔꿈치에 그윽히 남이있는듯 했다.
춘자를 고양이 같다고 한 내가 이번에는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살금살금 우리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