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헛수고 같은 댓가(代價)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허지만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인생(=時間)을 낭비하고 거기에만 눈이 어둡다. 그 맹목적인 가운데서 영화를 찾으려 허둥지둥 한다. 인생 및 그 다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영신의 성장(成長)』을 피터스 부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성생활誌에서】
모두 성장(成長)이 필요했다. 누가 그 이치를 알지 못하랴. 시간과 인생이 꼭 맞서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어느 한쪽의 버림을 받아야 한다.
사노라면 인생을 심각히 느끼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 때 영신(靈身)의 성장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물질 및 환락 속에 있을 때 영신의 일이다. 귓전에 들린다. 열심은 다 해야 하고 또 희생을 바쳐야 하는 영신의 생활, 그게 잘 사는 인생일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인생을 심각히 느껴 영신생활을 찾게되고, 물질 및 환락 같은데 자기를 물질적으로 불태워 버리는 그러한 환멸을 잡을 때까지는 그대로 내맡겨 둘 일인가? 아니다. 정녕 영신생활의 보다 나은 이해와 왜 그것이 참으로 유익하냐는 것을 영신이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그런 때가 오기전에 포촉해야 할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신자이거나 아니거나 어떤 인종, 문화권에 태어났음을 가릴 것 없이 인간이 이 땅위에 살고 있는(存在) 양식은 같은 것이다. 이를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는 우리가 다 천주님의 피조물(被造物)이요 그로인해 창조되었음을 말해준다.
그 엄격한 사실 보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인간은 제 갈길과 그 출발지를 잃었다.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망각의 지점(地点)에 서서 자기를 송두리째 상실한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거기 많은 해명이 필요치 않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게획대로 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영신의 성장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도 이지경에 이르면 한갖, 영신의 성장을 위해 그것을 옷입혀(着衣) 준 것밖에 안된다. 그렇다. 우리는 살고있는(存在)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 중심을 잡아들어가야 한다. 영신생활은 곧 우리가 창도죌 때 불밝혀졌던(神的) 그것을 찾는 일이겠다.
저 사철나무 푸른 단장을 보라. 제대로 두면 제멋대로 가지들을 뻗쳐 놓는다. 그게 잘 자란 꼴일까? 그것들을 모두 쳐주고 잘 손질해주면 그 안으로 부터 싱싱한 성장을 해가면서 사철나무 울타리답게 새로 자라난다. 덧없이 자라난 가지들을 베어 버리고 또 그렇게 올라온 순마저 처버릴 때 되레 그 중심부의 왕성한 성장을 도울 수 있다.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 가지들을 자르고 순을 쳐버리는 그런 희생일랑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바깥으로 뻗어 나갈 필요도 있다. 외부로 잘전해가야 한다. 다만 그 방향이 문제된다. 잘못된 방향은 그 길로 자라 나갈수록 그것은 덧없는 성장이 될 뿐이다. 외면에의 발전은 내면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속을 잃어 버릴 위험이 있는 발전은 그 발전이란 것이 하잘 것 없기도 하려니와 뻗어나갈수록 중심부 되는 안을 한없이 약화시켜 놓고 만다.
영신의 성장을 먼저 서두렀어야 할 일이다. 먼저 영신의 성장을! 만일 그렇게 먼저 할 일을 본말(本末)을 그르치지 안했으면 다른 성징(外面的)은 자연히 따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주님이 마련한 전체적인 성장인 것이다.
『천주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씰르 땅에 심은 후에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 아지 못할 동안에 씨가 싹이 나고 자람과 같으니 대저 땅이 스스로 결실케 할 새 먼저 싹이 나고 다음에 이삭이 패고 또 밀알이 이삭에 가득하여 곡식이 여물 때 곳 낫으로 베나니 대개 추수할 때가 당함이니라』(말구 4장26-29)
『우리가 천주께 말함이 기도요 천주께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영감이다』라고 한 대수도원장의 말대로 기도와 영감을 통해 우리의 영신이 자라갈 때 그 부산물(副産物)은 기쁨에 찬 생활과 값있게 살아가는 인생이 된다.
인간의 권리에 관해서 -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어았다. 이제 천주님의 권리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레오 1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