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8) 印度(인도) 거쳐 韓國(한국) 오신 朴神父(박신부)님
배론神學校서 잡혀
우리말은 제일 잘했고
발행일1963-08-25 [제388호, 3면]
「천주의 종」 박신부(Petitnico Ias=1828-1866).
그는 불란서 「쌩·디에」교구 출신으로서 1853년에 신부가 되어 곧 인도로 파견되었다. 열대지방의 기후는 그의 건강이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고 게다가 이미 불치의 병에까지 걸렸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보다 덜 더운 지방인 한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1856년 초 그는 「상해」로 와서 거기서 장주교와 신신부와 더불어 배를 타고서 3월 말경에는 새로운 임지인 한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가 있었다.
모든 전교 신부들이 한결같이 어렵게 생각하는 한국말이 그에겐 도무지 어려워 보이지가 않았고 그래서 방신부는 모든 이 중에서 한국어를 제일 빨리 또 제일 잘 이해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명민(明敏)한 행정력과 모든 난관을 쉽게 해결하는 민첩한 솜씨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불타는 전교열은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또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험한 길 눈 덮인 높은 산등이 그에게 하등 고생으로 생각되지가 않았고 하루에 180리쯤 걷게되는 것은 그에게 소풍격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이런 좋은 성격이 있는 반면에 단점도 갖고 있었는데 그는 교우들을 때로는 매우 성급하고 난폭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러한 결점을 이겨내고자 간_었이 자신과 싸웠다. 『찰고를 받을 때는 박신부가 제일 무섭고 고해소에선 그 이가 제일 좋았다』고 하는 교우들의 말이 신신부의 이러한 사람됨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닐가!
1860년경 박신부는 심한 두통 때문에 때로는 실신까지 하게되므로 장주교는 그를 「배론」 신학교로 보내서 거기서 쉬는 겸 신학생도 가르치면서 신신부를 돕게했다. 사전 편찬에 있어서도 박신부는 많은 협력을 하였다. 병인년 3월1일 박신부는 신신부와 함께 「배론」 신학교에서 잡혀 이어 서울로 압송되어서 신신부와 언제나 같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박신부는 미구에 한국이 큰 재앙을 겪을 것을 예언하였다. 3월11일 한강가 「새남터」에서 기쁜 마음으로 포졸의 세 번째 칼에 참수 치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