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시아」 재단의 도움을 얻어 지난 1월 4일부터 동10일까지의 사이에 인도(印度)의 서울인 「뉴델리」에서 열린 제26차 국제동양학자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ORIENTALISTS)에 참석하는 즐거움을 가졌었다. 이 국제동양학자회의의 제1차 회의는 1873년에 불란서 「빠리」에서 주로 「유럽」의 동양학자들로써 열리었으나 그 후회를 거듭함에 따라 미국 및 동양의 학자들도 참석하게 되고 1883년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에서 열린 제6차 회의부터는 거의 3년에 한번씩 열리게 되었으며, 그 연구 분야도 「아프리카」 대륙까지 넣은 태평양 연안의 여러지역으로 넓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동양학자 회의는 원래 서양인으로서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이었으나 그후 동서의 거리가 짧아지고 동양과 서양이 하나의 세계로 되어짐에 따라 온세계의 동양학자회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나는 1957년 독일의 「뮨헨」(MUNCHEN)에서 열린 제24차 회의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참석하여 「한국문화의 특성」이라는 논물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이 「뮨헨」회의에는 54개국으로부터 1327명의 학자가 모여 1주일 동안에 447편의 논물을 발표했는데 연구분야는 14지역으로 나누어졌었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은 일본 더불어 제12분과인 극과 동부에서 다루었으나 이 분과에서 발표한 논문은 10편에 지나지 않았고 그중 한국 관계는 독일 학자 「엑칼트」)ANDRT ECKARDT)와 나의 것 뿐이었다. 이 「뮨헨」회의에서 다음의 회의를 소련의 「모스코」에서 열리고 결정하였으나 제25차 회의의 주최국인 소련은 북한 괴뢰정권의 학자 6명을 초청하여 1960년에 이 회의를 열었었다. 그때 미국의 「아시아」학협회에서는 나에게 여비를 대줄터이니 이 「모스코」회의에 참석함이 어떠냐고 물어온 일이 있었으나 그때의 우리 사정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모스코」회의의 결정에 따라 제26차 회의가 중립국인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리게 되어 인도정부는 앞서 「뮨헨」과 「모스코」 회의에 참석했던 학자들에게 먼저 초청장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이 초청장을 받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우리 한국의 학자를 보내자고 여러가지로 노력하여 보았으나 여비관계로 겨우 4명만이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1월 2일 「뉴델리」에 도착하여 다음 날에는 우리 영사관에 들려서 이번 회의에는 북한괴뢰정권의 학자들도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때 긴장하였었다. 그러나 막상 4일 아침에 열린 개회식장에 나아가보니 A·B·C순서로 마쳔된 북한괴뢰정권(KOREA DEMOCRATIC REPUBLIC)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다음에 마련된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자리에는 당당히 우리들이 자리잡게 되어 나라를 가진 민족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번의 「뉴델리」 회의에는 49개국으로부터 1380명의 학자가 참가하기로 수속을 마치였으나 실제 회의장소에 모인 대표는 1200명 정도이었고 그 중의 절반이 인도학자들이었다. 1주일동안에 걸쳐 열린 이번 회의에서 발표하기로 제목을 신청한 논문은 817편을 헤아리었으나 이것도 참석자가 줄음에 따라 얼마쯤 줄게되었다. 연구분야는 10개 지역으로 나누고 그 중 제6지역인 인도학은 다시 5분과로 나누었으며 이 인도학에 관한 논문이 434편이나 되었다. 우리 한국은 제8분과인 극동지역에서 일본 · 중국 · 몽고와 더불어 다루어졌는데 이 8분과에서 발표하기로 제목이 제출된 논문은 모두 91편을 헤아리었다.
그중 한국관계의 논문이 16편이나 있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7편 북한괴뢰정권에서 5편 미국에서 2편 인도에서 1편 소련에서 1편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 제8분과에서 실제로 발표된 논문은 52편에 지나지 않았고 그중 한국관계가 6편이 있었다.
한국관계로서 발표된 눈문은 이숭녕(李嵩寧) 교수의 「한국 어간(語幹) 형성의 연구」, 고병익(高柄翊) 교수의 「근세(近世)에 있어서의 중국, 한국, 일본의 쇄국(鎖國)주의」 김정학(金庭鶴) 교수의 「한국과 일본사이에 있어서의 선사(先史) 문화관계의 간략한 분석」 인도에 있는 중국계통 사람인 「쟌연화」(YUN HUA JAN) 교수의 「혜초(慧超)와 그 업적의 재평가(再評價)」 「모스코」에 있는 하국의 2세인 김 게오르기(G. F. KIM)의 「한국에 있어서의 공장노동자의 초기적 발전형태」와 나의 「박해기에 있어서 한국 근대화를 위한 천주교의 공헌」이었다.
이러한 논문들은 각각 15분동안 읽어야하고 그후 5분동안의 질문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다음날 아침에는 훌륭한 책으로 만들어져서 모든 회원에게 분배되었다. 다행히 우리 한국 학자들의 발표는 모두 좋은 평을 받게되었다.
나는 논문을 발표한 후 외국인 세 학자로부터 매우 흥미있는 논문이었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특히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드 배리(W. T. DE BARY) 교수와 불란서 「빠리」의 큐지옹(MONTILLON CH CUZION) 교수의 요청으로 나의 논문원고 한부씩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즐거움을 가졌었다.
위에 적은 바로서 외국인 학자들이 극동, 그중에서도 우리 한국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반가왔다. 극동에 관한 논문의 수는 인도 이스람의 다음가는 셋째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것으로서도 극동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국제동양학회의가 아시아의 나라에서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만큼 인도정부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이 회의를 마련하여 여러나라 학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다음번의 히의는 미국에서 3년 뒤에 열기로 결정되었는데 그때에는 보다 많은 우리 학자들이 참석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많은 학자 가운데에는 10여명의 우리 천주교 신부들이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중에는 「홍콩」 화인(華人)대학의 교수인 예수회의 진윤서(陳綸緖) 신부와 일본 교도(京都)대학의 교수인 게시(DAVID F. CASEY) 신부도 끼어 있어서 나는 진 신부와 더불어 12일 주일 아침6시에는 아그라(AGRA)라는 곳에 있는 성당을 찾아가서 진 신부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한 일도 있었다. 4억3천8백만의 인구를 가진 인도에는 약7백만명의 교우가 살고있는데 워낙 신도의 수가 많은 힌두교 모스렘교 때문에 전교상 어려운 일이 많다고 그곳 신부에게 들었다.
그곳에서는 주일미사도 아침8시반에 한번만 드린다고 인도인 신부가 말하였다. 「뉴델리」의 대주교가 이번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을 초대한 일이 있었으나 나는 그 모임이 있는 줄을 몰라 섭섭하였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들이 국제학술회의에서 당당히 활약하고 계심을 보고 참으로 즐거웠다.
柳洪烈(史學家 · 文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