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복자)로 모셔야 할 26위 순교사기] (9) 聖金曜日(성금요일)에 殉敎(순교)한 吳神父(오신부)
死刑길 4百里를…
邦人神學生 密告가 動機
발행일1963-09-01 [제389호, 3면]
「천주의 종」 오신부(Aumaitre) (1837-1866).
불란서의 「앙구램」 교구에서 태어나서 「빠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서 사제로 승품되기는 1862년 이어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고국을 떠났다. 오신부는 「삐낭」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한국신학생을 데리고 그 다음 해인 즉 1863년 6월 말에 중국어선을 타고 연평바다를 거쳐 무사히 한국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그가 체포될 무렵에 그는 안 부주교의 전교지방이던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근방에서 전교하고 있었다. 병인년 3월14일 유다스가 된 신학생이 데리고 온 서울 포졸들한테 거더리에서 잡힌 안주교는 그 근방에 있던 민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수할 것을 명하였다.
한편 오신부는 피신하고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인해서 다시 한국땅을 디디게 되니 그는 혼연히 자수할 결심을 하고 안 주교가 있는 거더리로 갔다. 거더리에 이르자 즉시 포졸에게 잡히어 안 주교와 같은 방에 감금되었다.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안 주교의 복사인 황 누가, 이렇게 5명의 일행은 순교의 길에 올라 홍주를 지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서는 마침 왕이 병중이어서 양인을 죽이는 것이 불길하다는 점술가(占術家)들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사형터를 충청도의 수사(水使)가 있는 포령지방으로 옮기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멀고 고된 「갈바리아」의 길을 항시 조용하고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니 길가의 구경꾼들이 죽음의 길로 가는 그들의 쾌활함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장인 포령의 강가 갈매못에 이르렀다. 먼저 안주교가 완전히 옷을 벗기운채 포졸의 잔인한 칼날을 받아 참수 치명하자 곧이어 오신부가 두 번재 칼 밑에 순교를 하였다. 이어 민신부 황누가 배론의 회장이던 장요셉이 모두 용감하게 포졸의 칼 밑에 그들의 귀한 피와 살을 오로지 그들이 지닌 신앙 때문에 천주께 제헌하니 때는 1866년 3월30일 정오 바로 그날이 예수 수난 날이요 바로 그 시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