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沈않는 眞理안에서 새 槪念도 아니고
작년 9월말 공의회가 재개된 이래 교부들은 「교회」에 관한 요강을 토의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데 에끌레시아」(교회)는 공의회의 의안들 가운데 가장 용이하게 보일런지 모른다.
결국 「교회」란 새 개념도 아니며 새 기구도 아니다. 모든 시대의 최고 신학자들이 「교회」에 관해 명백하게 저술해 왔다. 교회는 비범한 자기증명감(自己證明感)을 가지고 온 세기를 통해 존속해가며 외부인들에 의해 가능한 모든 각도로 연구되었다. 난관은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비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어 마침내 신학 용어로만 규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만일 역사의 부침(浮沈)을 타도록 마련된 사회학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그 의의는 시대와 함께 변천했을 것이다.
敎會槪念再發見과 天主의 百姓
교회가 만일 그 추종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더라면 무개를 달고 크게를 재고 값을 평가해 가지고는 현대의 은어(隱語)로 타락하여 -「얼굴을 옆으로 돌린」 것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교부들이 보는 것과 같이 인간과 신(神)의, 인간과 영원의, 죄악과 닿을 수도 없는 성덕의 혼인(婚姻)으로서 「교회」를 본다면- 한 마디말로 「교회」를 신학적 신비체로 본다면- 「데 에끌레시아」라는 간단한 말은 그 뜻이 양양대해라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 「자유주의적」인 대다수의 교부들은 - 특별히 그러한 신비감을 살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법적」(法的)이나 단순히 「조직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판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일반인의 생각에는 「교회」란 교종 - 주교들 - 수도자들 - 그다음으로 평신도 식이 단순한 대수학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꼭대기에 전권을 가진 당국자들이 있고 밑바닥에 유순한 시민 대중이 있는 식의 「피라미드」로서 생각될지도 모르나 작년 11월 초에 공의회에서 가장 유행한 「교회」 를 뜻하는 용어는 「천주의 백성」이었다.
聖書에 바탕두고 平信司祭 資格 强調
「천주의 백성」 이란 「교회」 안에서 확실하게 세(洗)를 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인데 일부의 신학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떠한 교파이든지 진실한 신자들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천주의 백성」이란 말은 철저히 성서적(聖書的)일 뿐더러 가장 쓸데가 많다. 「교회」에 관한 토론에 있어 성직자들을 부정당하게 치중하거나 평신도를 부당하게 격하하기를 피하면서 「천주의 백성」을 강조했다.
죤 J. 라이트 주교가 공의회를 보도하면서 기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교회의 현재 기풍(氣風)은 평신도의 사제 자격을 강조하고 그들의 본당신부들 가운데 발견되는 「성직자 주의」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기로 되어 있다. 동 주교는 이상은 그날 오전에 자기가 공의회에서 말한 내용을 요악한 것임을 알렸다.
公議會가 再發見한 敎會에의 所屬感
이러한 새로운 강조는 신학적인 신설(新說)이나 문득 받은 새 계시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성사신학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니 -성체 · 견진 · 혼배가 바로 그것- 성서를 잘 읽거나 전례의 경문을 잘 따라가는 평신도에게는 알려진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공의회의 교부들에게 진지하게 생각되었다면 그분들이 고향에 돌아간 이제 교회의 일상생활에 굉장한 변동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대중은 가장 헌신적인 문자들까지도 법적 구성과 직제표가 아니라 「천주의 백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식으로는 「소속감」을 실지로 지니고 있지 않기 대문이다.
傍觀 · 非協調의 根源과 是正策
전반적으로 평신도들은 아직까지도 교회를 다만 성직자와 동일시 하고 자기 자신은 단순히 회비만을 납부하는 준회원으로 보고 있다. 교회가 아는 일 및 아니하는 일은 종교 「전문가」들이 -주교를, 수도자들이- 하는 일 및 아니하는 일과 동일시 한다. 모든 실지적인 목적을 위해 종교 「전문가」 그네들이 교회인 것이다. 그러한 교회관으로서는 평신도의 임무란 그 「전문가」의 사업경영자금을 조달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대신에 평신도는 자기들을 후견해 주는 교역자들이 제공하는 모든 봉사의 수익자가 된다.
재작년 「나쇼날 리비유」에 에블린 우오가 기고한 반박문에 이와같은 교회관이 약간 있지 않았던가? 우오씨의 화려한 영문에는 반항적이며 무질서에 가까운 정신에서 떨어진 한 사회의 한 가운데서 온화한 그리스도교적 질서 안에 살고 있는 목자적(牧者的)인 사제들과 신뢰하는 양떼의 한가한 한몸의 그림으로서 교회관을 보여준다. 아마 그러한 그림은 우오씨의 체험으로 사실상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체럼은 다르다.
封鎖當한 神學과 삐뚤어진 敎會觀
내가 생각컨대 허다한 패단에 대한 책임은 「교회」의 「성직자적」 개념이저야 한다. 교회의 「성직자적」인 개념은 무엇보다 먼저 너무도 자주 생활에서 봉쇄당한 신학의 결과다. 「전문가」들은 자기들에게만 있는 특수한 언어와 사도방식을 가지고 너무도 자주 자기들끼리만 자기들에 관해서만 독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신덕의 오묘한 도리가 일정한 문답 조문으로 동결되어 암송으로 반복되지마는 그러한 교리를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오묘한 도리가 살아오지 않는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 강생하지 아니한 채 되고마는 것이다.
한가지 저절한 예가 신학지도서에서 모든 한계마다 충실하게 동의해 가다가 사회 회칙에서 노새처럼 오뚝멈추어 아직도 서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발견된다. 그 모든 사회 회칙들은 신덕 도리에다 살과 피를 부여하려는 교회 최고 권위자의 기도(企圖)를 나타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외관상으로 신학에 속하지 아니한 곳 -「실사회」 안으로 신학이 부당하게 침범하기나 다름 없다고 규정한다.
誤認된 宗敎觀
그와 동일한 생각이 미국서 일어나는 인종문제의 위기에 미국의 교회는 부당한 행동을 취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왜 교회는 자기 할 일을 생각하여 종교를 설교하지 않는가?』라는 것이 그네들에게 공통한 불평이다. 그러니 그네들은 「교회」를 자기들을 제외한 성직자들만으로 동일시하고 「종교」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실사회를 멀리 떠난 형이상 개념과 동일시 한다.
敎會 · 聖職者 同一視가 構成한 結果
「그것」이- 교실에서 수녀가, 고해소에서 신부가, 주교관에서 주교가- 슬기롭지 않게 공평치 않게, 또는 그저 경솔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성직자적」이라는 개념에서 오는 제2의 불행한 양상이 내 생각에 떠오른다. 이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충만하다. 교역자들 가운데 발견되는 오만이나 우몽이나 무례를 거부하면서 그네들은 교회릘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배교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네들이 만일 교회를 그리스도와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백성과 동일시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그네들은 그와 같이는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그와 같이 행하지 않기에는 너무도 무지하였고 대부분의 경우에 일평생 교회로 돌아오는 길을 잃는다. 그네들의 실패는 도덕적 타락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지식의 결핍이라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친다.
司牧錯誤가 만든 빗나간 信仰生活觀
제3의 양상은 마치 하나는 「전문가」들을 위하고 또 하나는 준회원들을 위한 두개의 복음이 있는 듯이 「평신도 영성생활」을 뽐내면서 말하는 하칭에 예시된다. - 계속 -
죤 코글리
김익진 역